엄마가 버리기 시작했다

by 라프


# 동생 오기 3주 전

미국에 살고 있는 동생은 휴가를 오기 전부터 엄마에게 집을 치워 놓으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정리 유전자가 없는 엄마는 알겠다 대답하고, 나름 매일 10리터짜리 쓰레기 봉투 하나씩을 꽉꽉 채워 내놓았다. 하지만 수십년간 쌓아온 집안 곳곳의 쓰레기를 다 내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러다가 엄마집에 일이 있어 갔더니 그 사이 당근마켓의 중고거래에 눈을 뜬 엄마는 한쪽이 고장난 김치냉장고를 사와서 냉장고 옆에 두었고, 가로로 두어야 하는 냉장고가 들어갈 자리가 없어 세로로 놓여져 있는 바람에 비좁은 통로를 막아 버렸다.



여동생이 오면 쓰게 될 작은 방에는 아주 옛날 할머니가 사 주신 자개 농과 냉장고 그리고 엄마가 그림 그릴 때 쓰겠다는 책상 그리고 각종 쓰레기로 꽉차 있어서 어린 아이조차 누울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서 엄마에게 공간을 만들려면 물건들부터 버려야 한다고 말했고 엄마는 작은 방에 있는 냉장고, 벽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캠핑용 테이블, 큰방 중간을 다 차지하고 있던 원형 테이블 등등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을 새 주인을 찾기 위해 당근마켓에 올리는 것에 대한 동의했다.


작은방을 차지하고 있던 냉장고가 팔렸고, 냉장고가 하나 빠지자 마치 퍼즐에 하나의 공간이 생겨서 착착착 맞추어 갈 수 있게 되듯이 여러 가구들을 옮길 수 있는 공간이 생기기 시작했다. 다행히 쓸만한 테이블 두개도 팔렸다.


하루 종일 엄마와 함께 힘을 쓴 덕분에 주방에 있던 화장대는 엄마방으로 옮겨졌고, 침대 머리맡에 있던 책상이 사라지고 침대를 한쪽 벽으로 붙일 수 있게 되었으며 침대 아래에 생긴 공간에는 엄마가 그림 그릴 때 쓰겠다던 작은 네모 책상을 넣을 수 있게 되었다.


티비 놓는 선반으로 쓰던 책상은 여동생이 사용할 방으로 옮겨서 게스트룸의 완성도를 높였다.


그리고 안방에 있던 냉장고를 주방으로 옮겼으며 전자레인지 선반겸 식탁은 화장대가 있던 자리에 찰떡같이 쏙 들어갔다. 렌지대와 부대끼며 통로를 막고 있던 김치냉장고는 냉장고 옆에 가로로 놓을 수 있게 되었다.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아이들을 당근마켓에서 새 주인을 찾아 집 밖으로 내 보냈더니 꽤 많은 물건들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고, 여동생이 오기 전 동생이 몸 하나 뉘일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을 만들어 놓을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엄마의 요가매트를 놓을 안방의 공간도 무지 넉넉해 졌다.


# 동생 도착 일주일 후


동생이 도착하고 6일이 지난 토요일 전화가 왔다.


"언니, 나 더러워서 도저히 못 참겠어. 이번주 일요일에 엄마 중요한 일정 끝나고 그거 끝나는대로 나랑 같이 다 버리기로 약속했거든. 언니가 다음 주에 와서 도와줘야겠어. 언제 시간되?"


그리하여 월요일에 집으로 가서 함께 버리기로 했다. 집으로 가기 전 정리에 필요한 것이 없는지 물었더니 밀폐가 잘 되는 500ml와 750ml 주방용기를 사오라고 했다.


두 가지 종류를 사서 집에 도착했고, 엄마의 실험정신이 고스란히 담긴 주방의 대청소가 시작됐다. 손으로 무언가 만들기를 좋아하는 엄마의 작품으로 빨래비누, 된장, 고추장, 각종 양념과 젓갈 등이 무지하게 쌓여 있었다. 집안 곳곳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만드는 속도보다 먹는 속도가 훨씬 느린 관계로 계속 계속 쌓이고만 있었던 것이다.


그것들을 만드는 데 든 재료비와 엄마의 노고 등을 생각해 그 동안 절대 버리겠다는 마음을 먹지 않았는데, 이번에 동생과 약속을 했던 것이었다. '500ml'만 남기고 버리기로. 그 중에 맛있는 것이라면 특별히 인심써서(?) 750ml만 남기기로 합의를 본 상황이었다.


오후 2시 꽉꽉 채워져 있는 싱크대에 있는 물건부터 하나 둘 꺼내기 시작했고, 유통기한이 지난 것들, 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 너무 낡은 주방기구 등은 모조리 정리하기로 하고, 버리기를 시작했다.


그렇게 버리고 버리고 또 버리기를 5시간. 5시간 동안 냉장고와 주방을 꽉 채우고 있던 음식들 중 1/3은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들이었고, 1/3은 안 먹는 음식이었다. 수십개의 1.5L 페트병에 담겨 있던 것들을 최대한 버렸고, 음식을 만드는데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들만 남기고 대부분 버렸다.



버리다 보니 엄마는 신이 났는지, 남기겠다고 했던 것들까지 다 버리기 시작했다. 화장실 바닥에 있던 큰 김치통은 화장실과 주방 주변에서 나던 꼬리꼬리한 냄새의 주범이었는데 그 통에 담겨있던 장을 마지막으로 음식 버리기가 끝이 났다. 그렇게 버린 음식물 쓰레기만 31kg 이었다. 엄마는 신나게 버리면서 한 마디 했다.


"나 이제 아무것도 안 만들거야. 절대 안 만들어. 이제 그냥 사 먹어야지."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엄청난 양의 음식과 그 음식이 담겨 있던 플라스틱과 유리 용기들을 거의 한 트럭에 가깝게 버리고 나니 어딜 봐도 꽉꽉 차 있던 주방에 여유 공간이 생겼다. 엄마는 설거지를 하고 씻은 그릇을 씽크대에 바로 올려 놓고 정리할 수 있게 되어서 무척이나 기뻐했다.


엄마 살아 생전에 버리는 기쁨을 알게 되어서 정말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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