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인가를 계속 시도했다. 하지만 끝을 내지는 못했다. 시작하려고 할 때 도파민이 분출한다. 하지만 시작하고 얼마 안 가서 분출되었던 도파민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불안한 마음이 자리 잡는다.
‘이게 될까?’
‘다른 더 좋은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닐까?’
불안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를 믿지 못하는 마음에서 온다. 한 마디로 ‘자기 신뢰’가 없었다.
“어느 사회에서나 구성원이 씩씩하고 솔직한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하도록 음모를 꾸민다. 사회는 일종의 주식회사다. 구성원들은 주주에게 빵을 더 확보해 주려고 빵 먹는 사람의 자유와 문화를 포기하도록 합의한다. 거기서 가장 요구되는 미덕은 순응이다.”
랄프 왈도 에머슨은 그의 책 ‘자기 신뢰-인생의 모든 답은 내 안에 있다’에서 말했다. 사회는 개개인에게 ‘이렇게 살아야만 해’라는 것을 은연중에 강요한다.
“너는 무언가가 되어야만 해. “
오랜 시간 내 마음속에 나를 괴롭히고 있던 것도 바로 이 마음이었다. 무엇이 되어야만 했을까? 무언가가 반드시 되어야만 했을까? 물론 이 마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쓰고 있는 책 ’ 나는 왜 시작만 하고 끝을 내지 못할까(가제)‘의 첫 번째 독자는 계속해서 시작만 하고 무엇 하나 제대로 끝내고 있지 못하는 나이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돕고 싶은 마음에 쓰고 있다. 하지만 이 ’ 돕고 싶은 마음‘ 이전에 내 마음속에는 ’ 세상이 인정하고, 내 가족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 소위 ’ 있어 보이는 무언가 ‘가 반드시 되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며칠 전 문득 바로 이 ’ 무언가 되어야만 한다 ‘는 이 마음이 나의 모든 것들을 가로막고 있음을 깨달았다.
누군가를 진심을 다해 돕고 싶은 마음보다 ’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이 대두될 때 나는 이미 누군가를 ’ 진심‘으로 도울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인정받기 위해 내가 진실로 원하는 것보다는 ‘타인의 기준’에서 나아 보이는 것을 선택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일에 온 정성을 다하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때 비로소 위로를 느끼고 즐거움을 얻는다. 하지만 그런 정성과 노력이 없는 말이나 행동은 그에게 마음의 평화를 안겨주지 않는다.’
소로의 스승인 랄프 왈도 에머슨은 이렇게도 말했다. ‘타인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을 넘어 ’ 타인의 기준과 인정‘에 내 기준을 맞추려고 하는 순간 ’ 내가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에 정성을 다하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어렵게 된다.
물론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이 오히려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돕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오히려 그 마음이 방해가 되었다. 그런데 ’ 타인의 기준에 맞추려 했던 마음’을 인식하고 그 마음을 비우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진짜 내가 하려는 일을 통해 타인을 돕고 싶은 마음‘이 비워진 만큼 커졌다. 에머슨의 이 말처럼,
“내 인생은 자신을 위한 것이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책에서 이런 문장을 남겼다.
“내 재주는 많지 않고 또 평범한 것에 불과하더라도, 나는 실제로 여기 이렇게 있다. 그렇기에 다른 이차적인 증거로 내 확인이나 동료들의 확신은 필요치 않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해야지, 남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해서는 안 된다. 이 원칙은 실제 생활이나 정신생활에서 지키기가 아주 어려운 것이지만, 동시에 위대함과 평범함을 구분하는 결정적 지표가 된다. 왜 이 원칙을 지키기가 어려운가 하면, 어떤 것이 당신의 의무인지, 당신보다 더 잘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주변에는 항상 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내 주변에도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듯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말이 진실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내가 그곳에 존재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 내 마음을 계속 들여다보고 ’ 내가 진실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지?‘라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을 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 그들이 틀렸고, 내가 맞았다 ‘
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나는 에머슨의 말처럼 매 순간 객관적인 언어로 나의 생각을 말하려고 한다.
”지금 이 순간, 객관적인 언어로 당신 생각을 말하라. 그리고 내일이 되면 내일이 객관적으로 말해주는 것을 말하라. 그것이 오늘 말한 것과 정말 모순된다 할지라도 전혀 신경 쓰지 마라. (중략) 남에게 오해받는 것이 뭐 그렇게 대수란 말인가? 피타고라스도, 소크라테스도, 예수도, 마르틴 루터도, 코페르니쿠스도, 갈릴레오도, 뉴턴도 모두 오해를 받았다. 그러나 오해를 받는다는 것은 곧 위대하다는 뜻이다.”
나는 글을 쓸 때도 타인의 시선을 많이 신경 썼던 것 같다. 나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보다,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이 글을 어떻게 느낄까?를 말이다. 그런 면에서 어제 말한 나의 생각과 오늘 말한 나의 생각이 완전히 모순되더라도 전혀 신경 쓰지 말라는 에머슨의 말은 너무나도 위안이 되고, 한편으로는 내 생각을 거침없이 표현해도 되겠다, 괜찮겠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매일 나의 생각을 발견하고, 그것을 글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다. 특히 나처럼 대면해서 소통하는 것보다 글로써 소통하는 것이 훨씬 편안하다고 느끼는 사람에게는 말이다.
누군가 나처럼 ‘무언가 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진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가로막고 있는 사람에게 오늘의 이 글이 위안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