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남자들은 소변으로 불을 껐다

by 라프

# 자, 이제 불을 끕시다

2007년의 여름이었다. 회사에서 워크숍을 갔고 그날 밤의 마무리는 캠프파이어였다. 활활 타오르는 장작을 둘러쌓고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분위기가 정점에 이르면서 애사심의 분위기도 고조되었다. 밤이 깊어지고 하나 둘 하품하는 사람이 생겨나자 지점장님은


"자, 이제 정리하고 들어갑시다."


라고 했다. 그리고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그중 한 목소리가 이렇게 말했다.


"남자들은 불 끄고 갑시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 자리에 남자들은 깔깔대며 웃었고, 모두가 동조했다. 나는 순간 '이 분위기 뭐지?' 하는 생각과 함께 불 끄는 장면이 상상돼 몹시 불쾌했다. 몇 안 되는 여자들은 모두 숙소로 들어갔고, 남은 남자들은 결국 소변으로 불을 껐다.


# 수십 번의 고민 끝에 편지를 쓰다

금요일과 토요일 1박 2일 워크숍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일요일까지 주말 내내 고민했다. 누군가 캠프파이어를 소변으로 끄자고 말했고, 실제로 그 장면이 연출되었던 상황에 대해 회사에 공식적으로 문제제기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 말이다. 내가 말한 뒤에 생길 수 있는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만약 내가 이 얘기를 하고 난 뒤에도 회사를 계속 다닐 수 있을까? 얼마나 어렵게 일하게 된 곳인데.'

'별것도 아닌 일에 호들갑 떤다고 이상한 애로 보지는 않을까?'

'하지만 앞으로도 이런 일을 발생하지 말란 법이 없잖아?'

하지만 결국 나는 내가 겪은 불쾌함을 입 밖으로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지점장님에게 편지를 썼다. 지난 워크숍 때 있었던 캠프화이어 사건이 몹시 불쾌했으며 공식적인 자리에서 지점장님이 사과해주길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월요일 아침 떨리는 마음으로 회사에 갔다. 전체 조회가 시작됐고 여느 때처럼 지점장님은 모든 직원들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회의를 진행했다. 그리고 회의가 끝날 때쯤 내가 편지로 썼던 내용을 전 직원에게 얘기했고 이런 일이 발생하도록 방치한 것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 미안하다고 얘기했다.


지점장님은 그렇게 나의 문제제기에 대해 인정하고 공개 사과까지 했지만, 사실 그 자리에 앉아 있던 다른 직원들 중에는 '저게 지점장이 나서서 사과까지 해야 할 일인가?' 하는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지점장님이 그렇게 진심으로 사과해 준 것에 대해 감사했고, 그것으로 인해 이런 상황에 대해 문제의식을 전혀 느끼지 못한 사람들조차(그것이 여자든 남자든 간에) 한 번쯤은 공개된 장소에서 여러 명의 남자가 자신의 성기를 꺼내 놓는 그 장면이 누군가에게는 얼마나 끔찍한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 책상 위의 편지 한 통

아침 조회를 마치고 외근을 한 뒤에 돌아온 사무실. 내 책상에 곱게 접힌 A4 용지가 한 장 올려져 있었다. 펼쳐보니 아침 조회 때 있었던 상황에 대해 내게 항의하는 내용이었다. 편지의 요지는 그 일이 회사의 수장인 편집장이 나서서 직접 그것도 공개적으로 사과할 정도의 일이냐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편지를 쓴 주인공과 1대 1로 대화를 시작했다. 나는 무언가 억울하기도 하고 울먹거리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저는요.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이런 일에 대해 누구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나가면 앞으로 이보다 더 큰 불쾌한 일들이 생길수 있다고 생각해요. 성추행, 성폭력 이런 단어들로 성적으로 괴롭히는 단계들을 나눠놓았지만, 사실 성추행이든 성폭력이든 그걸 당하는 사람이 겪는 상처나 아픔은 크게 다르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흔히 성추행이라고 정의되는 행동을 여러 번 했는데 그것에 대한 아무 제제 없이 지속적으로 자행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누군가는 그런 상황으로 상처받는데 그런 마음을 전혀 모른채 계속 자기도 모르게 남에게 피해를 주며 살 수 있거든요. 어릴 때 문방구에서 볼펜 하나를 훔쳤는데 걸리지 않고 누구에게도 혼나지 않아서 '이거 괜찮은 건가 보다'하고 점점 대담하게 더 큰 것을 훔치다가 결국 대도가 되는 것처럼 말이죠.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내게 편지를 주고 나와 대화를 했던 그 사람에게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딸이 있었다. 그리고 울먹이며 얘기하는 내 말을 들으며 나의 이야기에 그의 딸을 대입해 보았던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엔 이렇게 말했다.

엘피님이 얘기한 게 맞는 것 같아요. 우리 딸 역시 그런 환경에서 키우고 싶지는 않거든요.


# 그래서 피해자가 원하는 게 뭐야?

어젯밤 자려고 누웠는데 박원순 시장과 관련된 기사를 보던 짝꿍이 내게 물었다.

가해자는 이미 죽었는데 이 피해자가 원하는 건 도대체 뭐야?


그래서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얘기했다.


본인과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거지. 본인이 힘든 상황이었을 때 주변에 도움을 청했지만 아무리 얘기해도 들어주지 않았고, 그 상황에 대해 조사하는 사람도 없었던 그 공무원 조직이 지금처럼 계속되지 않고 변화하기를 바라는 거겠지. 비서에게 주어지는 성역할에 대한 관행도 사라지길 바랄테고.


그러자 짝꿍은 피해자가 겪은 일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는 기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례식이 끝난 뒤 피해자의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말에서 피해자는 이 사건을 가해자의 처벌이 아니라 그런 가해자를 지속적으로 방치하고 그런 괴물을 키워내고 괴물로 인한 피해자를 끊임없이 만들어 낸 그 조직과 사회를 처벌하고 변화시키고 싶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나는 여전히 원순 씨를 좋아하고 그가 이 사회에 남긴 변화를 높이 평가하고, 여전히 원순 씨의 죽음이 아프고 안타깝다. 단지 그런 그의 성인지 감수성(성별 간의 불균형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갖춰 일상생활 속에서의 성차별적 요소를 감지해 내는 민감성을 말하며, 법조계에서는 성범죄 사건 등 관련 사건을 심리할 때 피해자가 처한 상황의 맥락과 눈높이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이해해야 한다는 개념 - [네이버 지식백과] 성인지 감수성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이 얼마나 바닥이었는지 확인하게 되어 더욱 안타깝다.


수많은 가해자들을 이 사회가 키워낸거라 생각한다. 어린 시절부터 남자 아이들에게 ‘니 고추를 그렇게 남들 앞에서 드러내 놓는 건 안 되는 일이란다. 너의 고추는 아주 소중한 거니까 말이야.’, ‘남자건 여자건 세상에 함부로 대해도 되는 사람은 없어. 늘 상대방을 존중해야지’ 이런 교육을 시킬 수 있는 사회였는가... 부족한 성인지감수성을 확인하고 키워줄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한 사회인것 같다.


그리고 누구보다 큰 용기를 내어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을 향해 들려주고 있는 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피해자 분에게 지지를 보내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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