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매년 이맘때쯤이 되면 우란분재가 시작된다. 우란분재는 목련존자가 지옥에 빠져 고통받는 어머니를 위해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음력 7월 15일에 불보실님과 덕이 수승한 스님들께 공양을 올려 그 법력으로 해탈의 문으로 들어가게 한 데에서 유래한 천도재로 49일 재인 우란분절까지 매주 1회씩 총 일곱 번의 재를 지낸다. 불교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 오신 날 다음으로 큰 행사라고 할 수 있다.
매해 우란분절이 되면 먼저 세상을 떠난 지인들의 이름을 한 분 한 분 올린다. 올 해도 15명의 이름을 올렸다. 사실 올리고 싶은 사람들은 더 많지만 나와 가까운 인연들로 추려 올리고 있다. 수많은 새 생명의 탄생과 죽음 중에 유독 나는 나이에 비해 많은 죽음을 경험했다. 오늘은 지난주에 1재를 시작한 우란 분절에 이름을 올린 나의 지인들을 기억해 보려 한다.
우란분절에 이름을 올릴 때 가장 먼저 적은 이름이다. 그만큼 나와 가장 깊은 인연이기도 하다. 작년 남동생의 결혼식 때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보지 못한 올케와 올케 가족들에게 아빠를 보여주고 싶어 아버지 사진으로 동영상을 만들었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 사진을 모아서 보여주었는데. 내가 태어난 해에 교통사고로 뇌를 다치기 전까지 아버지는 무척 모험심이 강한 행동파였다. 20대 초반에는 친구들과 뗏목을 만들어 낙동강 상류에서 하류까지 그 뗏목을 타고 내려오기도 했다. 결혼 후 아파서 몇 년간 병원 신세를 졌지만 강한 의지력으로 병상에서 일어났다. 퇴원 후 다시 자유롭게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을 때 아버지는 절룩거리는 발을 이끌고 전국 도보 여행에 도전하기도 했다.
지금 돌아보면 이런 아버지와 더욱 친하게 지내고 더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한 것이 많이 아쉽다. 엄마에게 가시 돋친 딸이었던 것처럼, 내가 그렇게 가시를 세우고 찔러대었던 대상이 이전에는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내가 세우고 있었던 가시에 찔려 아버지는 상처도 많이 받았을 것 같다. 살아생전에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렇다. 그래서 참, 미안하다.
우리 아빠를 포함한 일곱 명의 자녀. 각각의 아내 혹은 남편 그리고 최소 두 명씩 낳은 자녀들까지 마흔 명이 훌쩍 넘는 가족 모두가 할아버지가 일으키고 다져 놓은 사업으로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탱크 만드는 일을 가족 사업으로 만들었던 할아버지는 수완이 참 좋은 분이셨던 것 같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는 내게 무척 다정다감했다. 며느리인 엄마나 큰엄마들 그리고 자식인 아빠와 큰아버지들은 할아버지를 무서워했지만 손주들에겐 그 누구보다 좋은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가 가시기 전 병원에서 보았던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골반뼈가 부러져 회복이 잘 안 되셔서 급격하게 건강 상태가 나빠졌던 할아버지는 병원에 계셨는데 위독하단 소식에 삼촌네 가족과 내가 서울에서 내려가 병문안을 했다. 삼촌네 식구가 먼저 할아버지를 보고 나와 내게 말했다.
할아버지가 우리를 못 알아보시네.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할아버지 곁으로 갔다. 나를 보자마자 할아버지는 활짝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우리 신치 왔니?
나를 한 번에 알아보신 거다. 억지로 울음을 참으며 할아버지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돌아 나오며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할아버지 생전에 마지막 모습을 보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몇 년을 더 정정하게 살아계셨던 할머니는 참 지혜로운 분이셨다.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는 요양 병원에 계셨는데, 나는 일 때문에 대구에 갈 일이 있을 때마다 할머니를 찾아뵈었다. 몇 번은 초밥을 사서 갔는데 병원 밥이 입에 맞지 않아 많이 드시지 못한다던 할머니는 내가 사간 초밥을 정말 맛있게 드셨다. 가끔 할머니가 내게 전화를 하기도 하셨는데 한 번은 전화 통화에서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신치야 사람들에게 늘 좋은 말만 하고, 남의 험담은 하지 말아라.
병원에 갈 때도 늘 할머니는 80여 년의 인생에서 할머니가 배운 삶의 지혜를 내게 마음껏 나누어주셨다. 단지 내가 너무 어려서 할머니의 혜안이 담긴 말씀을 잘 담아내지 못했을 뿐. 지금도 자주 할머니가 보고 싶다.
나보다 한 살 많은 사촌오빠는 군대 제대를 앞두고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누나 두 명의 막내였던 사촌오빠는 사촌 동생인 나를 무척 잘 챙겨줬다. 수능을 마친 나를 데리고 노래방에 데려가 놀아줬던 기억이 난다. 사촌오빠 친구와 함께 갔던 노래방에서 처음 알게 된 이 노래는 지금도 내가 좋아하는 곡 중 하나다. 컨츄리 꼬꼬 멤버인 탁재훈이 부른 '너에게 나를'이란 노래다.
어둠 속을 날아서 기억의 저편에 서면
새하얀 달빛 사이로 그 모습이 보이지
너무 슬퍼하지 마 네 곁에 있는 걸
너의 영혼을 기다리고 있는 걸
비가 내려와 나 더 기대할 수 없었어
날 떠난 그날도 비가 내렸으니까
새로운 시작 위해 나 살 수밖에 없었던
작아진 내 모습에 난 슬퍼질 뿐야
오 나의 작은 불씨로 다시 불러 보는 그 숨결
바로 곁에 니가 있는 듯 내 영혼이 떨리지
예언에 창을 넘어서 저기 달려오는 불빛은
꿈이라고 해도 좋으리 너이기를
비가 내려와 나 더 기대할 수 없었어
날 떠난 그날도 비가 내렸으니까
새로운 시작 위해 나 살 수밖에 없었던
작아진 내 모습에 난 슬퍼질 뿐야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너무 이른 나이에 한 줌의 재가 되어버린 사촌오빠 생각을 한다.
큰아버지와 작은 고모에 대한 추억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동생이었던 우리 아빠에 대한 애정이 컸던 분들이다. 아빠가 아파서 할 수 있는 활동이 제한적이었던 우리에게 물심양면 많은 도움을 주셨던 분들이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멀리 떨어져 살아서 어릴 때도 자주 보지 못했다. 오히려 사진으로 본 횟수가 훨씬 많다. 특히 외할머니는 오랜 시간 병상에 계시다가 내가 초등학생 때 돌아가셔서 함께 한 추억이 정말 적다. 외할아버지도 할머니처럼 돌아가시기 전에 꽤 오랜 시간 요양 병원에 계셨다. 그나마 안산에 있는 요양 병원에 계셔서 가끔 안산 쪽으로 일이 생겨 가게 되면 병원에 들리곤 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말씀은 잘 못하셨지만 눈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던 할아버지를 찾아갔다. 그날따라 오랜 시간 병원에 계신 할아버지가 얼마나 답답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휴대폰을 꺼내 할아버지에게 바닷가에서 찍은 사진과 산에서 찍은 사진을 많이 보여 드렸다. 그때 할아버지가 무척 좋아하셨던 기억이 난다.
외삼촌은 편찮으신 외할머니를 오랜 시간 혼자 돌봐 드렸다. 그래서 느지막이 결혼해 딸 둘을 낳고 잘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가셨다. 결혼 전에는 서울에서 대구인 우리 집까지 종종 놀러 오곤 했다. 눈이 크고 부리부리하게 생긴 외삼촌도 가끔 생각이 난다.
나를 글쓰기의 길로 인도해 주신 사부님. 사부님과의 추억은 너무 많다.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에 내게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불어넣어 주신 분. 내가 무얼 하든 할 수 있다 믿어준 나의 은인. 돌아가시기 전부터 등이 아파 주무시기 힘들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내가 해 드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부디 사부가 다시 건강해지기만을 간절한 마음으로 바랄 뿐. 하지만 결국 4월의 봄 사부는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사부가 떠나기 전 병원에서 사부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체온이 남아 있던 사부의 따뜻한 손을 잡았고, 최대한 끓어오르는 눈물을 머금고 사부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부님 고마워요. 사랑해요.
터져 나오려는 눈물에 두 마디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병실에서 나와 펑펑 울었다. 사부는 떠났고, 영원히 내 가슴에 하나의 별로 남아 있다.
N은 드러머였다. 부산 공연 하나 마친 뒤에 또 다른 공연을 앞두고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의 최근 통화 목록의 마지막 통화는 나였다. 광화문에서 친구와 차를 한잔 하고 일산 쪽으로 드라이브를 가려던 찰나에 그녀의 죽음을 알리는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나는 떨리는 가슴으로 그녀의 장례식장으로 달려갔다.
그녀의 장례식장에 3일 내내 있었다. 3일간 있으면서 마지막으로 그녀와 대화를 나누며 들었던 사람들도 찾아왔고, 다시금 생전에 본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끊임없이 떠올렸다. 사랑하는 나의 친구. TV 프로그램의 무대 위에서 드럼을 치는 사람을 볼 때마다 그녀를 떠올린다.
H는 첫 직장에서 나와 두 번째 회사에서 같이 일했던 회사 대표님이다. 스타트업이었던 회사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던졌지만 결국 투자 유치에 실패해 본인의 모든 것을 받힌 회사는 문을 닫고 말았다. 시작은 함께 했으니 마지막을 함께 하지 못하고 중간에 나와 버려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살롱 9에서 일을 하고 있던 어느 오후 문자가 왔다.
H, 본인상
문자를 보자마자 너무 놀라서 같이 일했던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이상한 문자를 받았어. H 대표님 본인상이라니. 이거 뭐야?"
"응. 안 그래도 나도 지금 연락받고 너무 놀랐는데 사실이야. 대표님이 돌아가셨어."
그리고 우리는 그의 장례식장에서 만났다. 회사에서 으쌰 으쌰 함께 했던 멤버들을 모두 만났고, 우리는 몇 년 전 회사에서 있었던 일과 이미 고인이 되어버린 대표님에 대한 추억으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M 언니는 변화경영 연구소의 연구원 동기다. 7명 중 유일하게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 결혼 후에 아이를 가지려 부단히 노력하던 중에 예전에 앓았던 병이 재발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언니는 세상을 떠났다.
치료를 받던 때 언니는 나의 소개로 명상 센터 원장님에게 개인 지도를 받았다. 깡 말라 거의 뼈 밖에 없어 혼자 걷는 것도 힘들어하는 언니를 언니 아버님이 데리고 다녔다. 원장님 개인지도를 받고 나면 얼굴빛이 많이 회복되어 나가곤 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움직이기 힘들어서 결국 개인지도를 다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연구원 마지막 수업 시간에 함께 찍은 사진을 볼 때마다 그리고 동기 모임을 할 때마다 언니 생각을 한다.
어느 날 동아리 밴드에 들어가서 사람들이 쓴 글을 보는데
J,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라는 댓글이 있었다. 뭐지? 나 작년 겨울 동아리 연주회 때 분명히 J 언니를 봤잖아? 그제야 지난 게시물들을 찾아보니 언니의 본인상을 안내하는 글이 눈에 띄었다.
전화번호가 바뀌어서 전달을 받지 못한 것이다. 언니를 본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그 사이에 세상을 떠나 버려 이제는 영원히 볼 수 없게 되었다니 정말 가슴이 아팠다. 얼마 후에 다른 선배와 통화를 하다가 언니가 지병이 있었고, 그것이 재발해 갑자기 떠났음을 들었다.
엄마의 오랜 친구가 있다. 아줌마는 평생 아이를 가지고 싶어 했다. 아이를 셋이나 낳은 엄마를 보며 힘들어했다고 한다. 결국 가장 친한 친구였던 아줌마는 엄마와 인연을 끊고 오랜 시간 보지 않았다. 그런데 작년에 갑자기 아줌마에게 연락이 왔다고 했다. 아파서 앞으로 살 수 있는 기간이 6개월도 채 남지 않았다고 한다.
얼마 남지 않은 생에 아줌마는 가장 친했던 엄마가 보고 싶었나 보다. 엄마는 몇십 년 만에 봐도 어제 본 것처럼 아줌마를 대했고, 그렇게 무심한 듯 마음을 쓰며 거의 매일 아줌마를 찾아갔다. 병이 나을 수 있는 방법도 같이 찾아보았지만, 결국 아줌마는 세상을 떠났다.
엄마는 장례식장에 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엄마에게 장례식 장엔 왜 가지 않았냐고 물었다.
"거기는 뭐하러 가. 가기 전에 같이 있어줬으면 됐지."
엄마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됐다. 장례식장에 가서 친구의 죽음을 굳이 다시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리고 엄마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너, 예전에. 친구 떠났을 때 많이 힘들었겠다. 그때는 네가 얼마나 힘든지 몰랐어.
매해 우란분절이 되면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떠올리고, 그들을 추모하고 애도하며 가까이에 살아 있는 엄마와 동생들 그리고 짝꿍과 도반들 주변 친구와 지인들까지 살아 있을 때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있을 때 잘해야지.'
태어나는 데는 순서가 있지만, 죽음에는 순서가 없다는 말. 매해 이미 떠나버린 그들을 생각하며 나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순간 혹은 내일 당장 이 생을 마감하게 된다면 나는 무엇을 가장 후회하게 될까? 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