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계를 시작하다
사촌언니의 둘째 돌잔치가 있는 날이었다. 대구에서 고모와 사촌오빠가 왔고, 서울에 살고 있는 삼촌네 식구와 선미 그리고 지나가 참석했다. 오래간만에 모여 다 같이 점심 식사를 하고 저녁에는 이십여 년 만에 이사를 한 삼촌네에서 집들이 겸 2차 모임을 하기로 했다.
고모와 엄마 그리고 숙모와 사촌동생은 차로 이동했고, 삼촌 사촌오빠와 함께 선미는 지하철로 이동했다. 집 근처 마트에서 삼촌이 먹을거리를 사는 동안 선미는 와인을 사려고 했는데 집에 와인이 많은데 안주가 없다는 사촌동생의 말을 듣고는 치즈 몇 종류와 집들이 선물인 ‘잘 풀리는 집’ 휴지 한통을 샀다.
사촌동생이 빌려준 냉장고 바지로 갈아 입고는 본격적으로 집들이 행사에 참여해 옛 추억을 안주 삼아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사촌 동생과 사촌오빠 그리고 돌잔치를 했던 언니의 첫째가 여행을 다니기 위해 매달 돈을 모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돈으로 작년에는 일본 여행을 다녀왔고, 올해 초에는 양쪽 가족이 모여 강화도 펜션에서 1박 2일 여행을 다녀왔다는 것이다. 순간 여행의 존재를 알려주지 않은 것에 대한 약간의 서운함이 지나의 얼굴을 스치는 듯했다. 삼촌이 선미에게 얘기했다.
“선미야, 너도 같이 해~ 같이 해서 여행 다니고 그래라.”
“아… 저는 같이 못 갈 가능성이 커서요…”
그렇게 삼촌네에서 집들이로 뜨거운 토요일 밤을 보내고, 돌아온 월요일.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계속 사촌동생과 사촌오빠가 한다는 여행 계 모임이 생각났다.
엄마 지나의 인생에 큰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아빠의 가족들. 보통 남편이 저 세상 사람이 되면 시집 식구들과 왕래를 끊는다고 하는데, 지나는 아빠가 돌아가신 이후에도 늘 빠짐없이 설이나 추석 연휴에 선미와 함께 큰아빠 집에 가서 아빠 조상들의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작년부터 이런저런 이유로 설과 추석 연휴에 큰아빠 집에 모이기가 힘들어졌다. 유일하게 1년에 두 번 친척들과 만나던 기회도 사라져 버린 마당에 여행 계는 그나마 지나와 선미가 친척들과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래서 선미는
그래, 나는 못 가겠지만. 엄마라도 같이 놀 수 있게 여행 계를 들자.
라고 결심하고, 사촌 동생에게 그 여행 모임에 함께 하겠다고 연락을 했다. 선미는 지나에게 연락해 그 사실을 알렸고, 지나는 매달 내는 돈의 일부를 같이 내주겠다고 했다. 여느 때처럼 선미는 지나의 제안을 마다하지 않고 감사히 받아들였다. 그렇게 여행 계의 첫 모임비를 입금했다.
그리고 한 달 뒤 회사에서 퇴근 후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는데 사촌오빠에게 전화가 왔다.
“선미야, 이번에는 코로나 때문에 여행은 안 가려고 했는데, 사촌동생 지인이 펜션을 잡아놨는데 하나가 남는다고 그냥 쓰라고 했다네. 3주 후 토일 월요일인데 너 갈 수 있어?”
“아… 가게 되면 토요일에 잠깐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일단 엄마한테 갈 수 있는지 물어보고 갈 수 있다고 하면 엄마만이라도 갈게.”
사촌오빠와 전화를 끊고 지나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 사촌오빠가 토일월 여행 같이 가자는데 어때?”
“응. 좋아. 너는?”
“나는 못 가지. 엄마 혼자 고모랑 같이 갔다 와.”
“같이 가자. 이럴 때 빠지지 말고. 가족들이랑 또 언제 이렇게 가겠어.”
“글쎄. 생각은 해 볼게.”
사촌오빠에게 문자를 보냈다.
“엄마는 갈 수 있을 것 같음. 나는 못 갈 가능성이 크고.ㅎㅎ”
선미는 주말 스케줄이 가장 바쁘다. 원장님에게 명상 지도를 받을 수 있는 시간이 주말뿐이기 때문에 그때는 되도록이면 다른 일정을 잡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에도 안 가겠다고 미리 얘기는 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다른 가족들은 모두 끼리끼리 오는데 우리 가족 중에는 엄마 혼자 보내는 게 마음에 좀 걸렸다.
그렇게 고민을 하다가 주말에 일정을 마치고, 주말 일정이 일찍 마치면 일요일 늦게 가거나 월요일 새벽에 가서 엄마와 속초에서 1박 2일로 여행을 더 하기로 했다. 마침 엄마 집에 가는 길이라 선미는 지나에게
“엄마, 가족들이랑 가서 재미있게 놀고, 나는 월요일 일찍 가서 엄마랑 1박 2일로 따로 놀자. 어차피 친척들 모여서 옛날 얘기하는 거 재미없어."
웬일로 지나는 아주 쿨하게,
"그래. 너 주말 일정 때문에 그렇지? 그래 그럼. 나도 둘이 노는 게 더 좋아."
그렇게 가족 여행 참여는 일부만 하기로 결정됐다. 지나가 좋아하는 수영장이 있는 호텔에서 1박 2일 일정을 짜 보려고 예약을 알아봤는데 성수기라 괜찮은 곳은 예약할 수가 없었다. 결국 이번 가족 여행 일정은 포기하기로 했다. 지나 역시
"왔다 갔다 시간 다 보내고 와서 놀 시간도 없는데. 그냥 오지 마."
라고 해서 선미는 그렇게 지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가족 여행 일정이 가까워질수록 왠지 마음이 개운하지가 않았다. 그래도 '자식이 하나라도 옆에 있어야 우리 엄마 기가 좀 살 텐데'하는 마음이 컸다. 결국 뒤늦게 회사에 휴가를 신청했다.
드디어 여행 당일. 엄마와 삼촌네 식구 그리고 고모네 가족까지 모두가 강원도로 여행을 떠나고, 선미는 주말 일정을 마치고 밤늦게 시외버스를 타고 가족들이 있는 여행 장소로 향했다. 새벽 1시가 넘어 숙소에 도착했다. 선미를 위해 준비해 놓은 맥주 두 캔을 마시며 사촌오빠 그리고 엄마와 함께 수다를 떨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난 고모 지나와 함께 선미는 산책을 하러 갔다. 콘도 뒤편에 보이는 넓은 농지 사잇길을 걸으면 좋겠다 싶었다. 선미는 모르고 있었던 가족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으며 1시간가량의 산책을 마치고 돌아왔다.
지나는 여러 번 고모에게 말했다.
형님, 선미 너무 잘 오지 않았어요? 어제 새벽 늦게 왔어도 이렇게 얼굴 보니 좋죠?
라며 기쁜 마음을 감추지 않는다. 선미 역시 지나의 말에 괜히 뿌듯해서 어깨가 으쓱 올라간다. 숙소 근처에서 맛있는 갈치조림을 점심으로 먹고 드디어 서울로 출발.
4시간가량 차 안에서 고모, 지나 그리고 선미는 아주 밀도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선미가 우울증으로 힘들었던 얘기, 극복해서 잘 지내고 있다는 얘기를 했다. 고모가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요양 병원에 입원 중이던 할머니를 찾아가 깨끗하게 목욕시켜 드렸는데 할머니가 엄청 좋아하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때 병원에서 간병해주시는 분들이
"이렇게 많은 환자 분들이 있고, 그분들의 자녀와 가족들이 있지만. 환자분 목욕시켜주는 건 처음 본다"
고 했다는 말을 들으니 왠지 울컥했다. 순간 지금 나와 같이 숨 쉬고 있는 소중한 이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것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생각이 많아 걱정이라는 고모의 휴대폰으로 명상센터 유튜브 채널 보는 법을 알려드렸다.
고모, 하루에 한 번씩이라도 매일 꾸준히 꼭 해 보세요. 처음에는 '아, 내가 이렇게 생각이 많구나'하는 걸 알게 될 거고. 하다 보면 '생각을 잠시나마 멈추고 쉴 수 있는' 순간이 올 거예요. 그때까지 매일매일이요.
이번 여행에 가야겠다고 생각한 결정적 이유 중에 하나는 연세가 많으신 고모와 또 언제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하는 마음도 컸다. 다녀오는 차 안에서 고모와 폭풍 수다를 떨고 나니 선미는 이번 여행에 오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