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영원한 이별을 한 뒤 몇 년간은 가정에 평화가 찾아왔다. 선미가 직장을 잃고 방황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선미는 하늘을 날고 싶었다. 고등학교 때 ‘파일럿’이란 드라마를 본 후에 파일럿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이 있었다. 고3을 앞두고 뒤늦게 찾은 새로운 꿈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공군사관학교에도 지원하려 했지만 성적이 좋지 않아 포기했다. 그리고 파일럿 이전의 오랜 꿈이었던 수학 선생님을 차선책으로 선택해 자연계열로 진학했다.
대학교 1학년 때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찾은 미국에서 우연인지 운명인지 알 수 없는 인연이 이어졌다. 힘들 때 연락하라며 삼촌에게 전해 받은 분의 직업은 패러글라이딩 강사였다. 그리고 아저씨의 도움으로 LA로 가는 길에 만난 택시 기사 아저씨는 원래 파일럿이 직업인데 택시 일은 부업으로 한다고 했다.
‘댕. 댕. 댕.’
대학 생활에 취해 잊고 있던 가슴속의 꿈이 다시 날개를 펴려고 꿈틀거렸다.
서울의 현실로 돌아온 선미는 패러글라이딩 선생님인 아저씨에게 메일을 보냈다.
“아저씨 미국 항공 학교에 가고 싶어요. 모아놓은 돈 없이 가도 공부하며 지낼 수 있을까요? 최소 얼마를 가지고 가야 할까요?”
그리도 곧 아저씨의 답메일이 도착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메일을 열었다. 메일을 읽자 희비가 교차했다. 한편으론 희망이 생겼고, 또 한편으론 걱정이 앞섰다.
“선미 양. 와서 제대로 공부를 하려면 최소 5천만 원은 가지고 오는 것이 좋습니다.”
대학 3학년이던 선미에게는 또 다른 목표가 생겼다.
‘5천만 원. 그래, 빨리 취직해서 5천만 원을 모으자!’ 1년 정도는 휴학해 주는 것이 어느새 당연한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선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5천만 원을 모아서 유학을 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학과 공부를 제외한 다른 모든 활동에 열심이었던 선미의 졸업성적은 흔히 대기업에서 요구하는 커트라인인 성적 3.5에 미치지 못했다. 기본 요구 조건에서 이미 불합격이라 이력서를 아무리 내도 갈만한 곳이 별로 없었다.
결국 첫 직장에서 영업을 시작했다. 선미가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지나에게 다짐한 것은 오천을 모아서 유학을 가겠다는 것이었다. 지나는 그 말을 찰떡 같이 믿었고 선미가 매일 술을 마시고 용돈 한 푼 주지 않아도 그저 ‘잘 모으고 있겠거니’하고 기다렸다.
하지만 꽉 채운 5년을 얼마 남기지 않은 어느 겨울에 선미는 회사에서 영업 실적 저조를 이유로 해고당하게 되었다. 들쑥날쑥한 영업 실적을 따라 들쑥날쑥한 월급으로 매달 나가는 카드값을 메우지 못해 선미의 통장은 이미 마이너스였다. 그리고 그 마이너스는 제3금융권 대출까지 손을 대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선미는 지나에게 SOS를 요청했다.
“엄마 나 돈 좀 빌려줘.”
현재 재무 상황을 상세히 얘기하지 않으면 절대 도와주지 않겠다는 지나의 요청에 선미는 최악의 상황을 브리핑했다. 그리고 남은 학자금 대출과 카드값 돌려막기를 위해 받았던 제3금융권 대출까지 지나의 도움으로 모두 정리를 하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다.
지나의 이야기
IMF 이전의 잘 나가던 시절이었다면 항공 유학자금 5천만 원은 어렵지 않게 구해 이미 선미가 유학을 강 수 있게 해 주었을 텐데. 선미가 꿈을 이루는 데 경제적인 도움을 주지 못한데 대한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선미가 돈을 벌어 유학을 가겠다고 한 것이 기특하고 또 자랑스러웠다. 매일 술을 마시고 새벽에 택시를 타고 들어와도
‘그래도 저축을 조금은 하고 있겠지’
하는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저축은커녕 빚만 늘어나 있는 상황을 보니 지나는 기가 막혔다. 지나는 선미 아빠가 가고 나서 고3이었던 막내까지 먹여 살리느라 힘들게 죽어라 일하는데 선미는 온갖 핑계로 혼자 제주도로 3개월 여행 가고, 같이 집 청소 좀 하려고 하면 기분 나쁘다는 핑계로 카페로 도망가 버리는 선미를 보며 머릿속이 복잡하다. 거기다 5년간 일해서 남은 게 빚뿐이라니.. 너무 열심히 살아서 선미가 약해졌구나 싶어 허탈한 마음이다.
선미의 이야기
직장생활을 시작할 때는 정말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에서 5천만 원을 모으리라'는 의지가 아주 강렬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선미가 생각하고 했던 영업 방식은 실제 영업의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사람들과 친해지기만 하면 고객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리 쉽게 자신의 지갑을 열지 않았다.
사실 선미는 회사의 해고 통지를 받는 그 순간까지도 본인이 왜 잘못했는지 몰랐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면 문제일 수도 있다. 흔히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착각처럼 '나는 다 잘했는데 내 환경도, 주변 사람도 나 빼고 다 문제야'하는 그런 착각 말이다. 이기적인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내가 제일 잘 났고, 세상의 모든 사람이 못났으며 내가 하는 일이 바로 정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