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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캬닥이 Apr 28. 2022

한국 SF의 새로운 실험

<초월하는 시대의 사랑> 감상평

<초월하는 시대의 사랑>은 다섯 명의 한국 작가들이 쓴 SF 소설입니다. 단편선이자 근미래 나올 장편의 프리퀄 모음집입니다. 작품 다섯 편은 소재부터 배경까지 모두 다른 이야기입니다.


표지 출처 알라딘


<긴 예지>는 한 사람의 우울이 윤회하는 세계로 확장하는 소설입니다.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 틀어박히는 주인공은 대부분 독자와 다르지 않습니다. 현실과 작중 세계의 다른 점은 확률게임 ‘볼볼볼’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공을 맞추다보면 세계 멸망으로 게임 오버가 되거나 넘어갑니다. 살아갈 희망을 잃은 주인공과 아무 의미 없는 게임은 어떻게 엮일까요? 잿빛 배경에 아주 가끔 푸른 희망의 빛이 보이는 소설입니다. 


무심코 게임 캡처 화면을 찾아 인터넷에 볼볼볼을 검색했습니다. 당연하지만 캡처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상상 속 볼볼볼 이미지를 만들고 보니 책 표지가 볼볼볼을 형상화한 것이었습니다.


<돌아오는 호수에서>는 아름다운 호수를 배경으로 한 보이 밋 걸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이 보이나 걸이 아니더라도 보이 밋 걸 이야기는 있을 수 있지요). 너무 맑아서 불길한 호수는 틈을 놓치지 않고 장르를 뒤집습니다. 다섯 편의 작품 중 가장 '프리퀄스러운' 이야기입니다.


맑고 아름답지만 들어가면 죽는 지구 곳곳의 산성 호수에서 영감을 받은 것 같습니다. 출처: Discovery Channel UK


<슬프지 않은 기억칩>은 인간의 기억을 공유하는 로봇들의 이야기입니다. 추억 없이 태어난 로봇들은 누군가의 어린 시절 기억을 공유하는 것으로 자아를 갖겠다는 욕망을 채웁니다. 이들이 왜 사람이 되고 싶은지, 어쩌다 아이의 기억을 공유하게 되었는지는 이야기가 진행되어야 알게 될 것 같습니다.


로봇끼리 집단 상담을 하는 장면이 머리속에 떠올랐습니다. 출처: www.aa.org 


<커뮤니케이션의 이해>는 이능력물입니다. 정체불명의 외계 바이러스로 사람들 중 일부에게 초능력이 생깁니다. 그냥 초능력이면 편하겠지만, 작품 속 초능력은 능력자가 통제하지 못하면 폭주하고 마는 불완전한 능력입니다. 한국식 이능력물답게 능력자와 국가 기관의 대립을 배경으로 친구와 가족이 갈등합니다.


<이 다음에 지구에서 태어나면>은 책에 나온 작품 중 가장 SF답지 않은 이야기였습니다. 주인공은 외계인을 안내하는 여행사 직원입니다. 작중 외계인은 지구인과 닮았을 뿐 아니라 지구인의 미적 기준에 딱 맞는 미남미녀입니다. 작가가 설정을 천연덕스럽게 짠 설정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초월하는 시대의 사랑>은 장르도 SF지만 책 자체가 여러가지 실험의 결과물입니다. 첫 번째로 SF를 써보지 않은 작가가 SF를 썼습니다. 작가 소개를 찾아보기 전까지는 어느 작품이 진짜 SF(?)인지 알 수 없게 섞여 있고요. 현실이 소설보다 더 사이버펑크스러운 시대, SF와 SF가 아닌 것을 나누는 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SF답지 않은 SF를 접하며 저 스스로 무엇을 SF라고 생각해왔는지 곱씹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실험은 ‘세상에 나오지 않은 작품의 프리퀄 모음’이란 컨셉입니다. 출판사 책 소개에도 나와있듯 작품 다섯 편은 시공간을 초월해서 독자에게 온 작품들입니다. 독자는 왜 프리퀄이나 외전을 읽을까요? 재미있는 작품의 여운은 현실로 돌아가기 싫을만큼 강렬하기 때문입니다. 독자는 지푸라기 잡듯 다음 이야기를 찾습니다. 그러나 다섯 작품의 본편은 현 시점에서는 나오지 않은 상태입니다. 독자 입장에서는 모르는 작품의 프리퀄을 굳이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시공간이 초월되지 않아 다섯 편의 멋진 장편을 먼저 읽고 프리퀄 모음집을 접했다면? 평범하지만 읽기는 더 즐거웠을 것 같습니다.


각 작품은 본문의 프리퀄인 만큼 이야기를 진행할 여지를 남겨두어야 하지만, 작품 하나만으로도 엄연히 독립된 이야기이니 완결은 되어야 합니다. 컨셉이 어렵다 보니 독자 입장에서는 완전한 이야기를 접하지 못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장편의 한 장(章)은 단편이 될 수 없습니다. 단편 소설에 필요한 설정은 짧은 반면, 장면 하나하나의 밀도는 높아집니다. 짧은 분량 안에 주제를 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장편 소설은 큰 설정을 천천히 풀어가며 이야기가 나아갑니다.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면서도 독자가 읽기에 재미있는 작품을 써야 하니 작가들께서 많이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실험은 한 방에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한국 SF는 급격히 성장 중입니다. 장르가 빠르게 성장하는 배경에는 출판사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SF 애호가로서 허블같은 SF 전문 브랜드가 생겨난 것도 감사한데, 여러가지를 시도하며 다양한 SF 작품을 만들어주니 참 고맙습니다. 다섯 작품이 다섯 권의 장편이 되어 서점에서 만날 미래를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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