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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캬닥이 Jun 17. 2022

전문세, 깊이와 넓이,
과학 커뮤니케이션

운전을 시작하며 팟캐스트를 다시 듣고 있다. <전쟁사, 문명사, 세계사> 이하 ‘전문세’다. 이름처럼 세계사를 다룬다. 역사 기록을 토대로 어느 지역을 백 년, 장소를 바꾸어 백 년 이야기한다. 중간중간 연도를 언급하며 동시대 다른 곳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상기해준다. 대학원 다니며 표본을 슬라이드 글라스에 올려놓는 등의 단순 노동을 할 때 귀가 심심해 듣기 시작했는데, 그 때는 춘추전국부터 듣다가 이제는 송나라까지 왔다. 자투리 시간마다 천사백 년의 역사를 들은 셈이다.


실험이든 운전이든 팟캐스트에만 귀를 기울일 수는 없다. 이야기 대부분은 한 귀로 들어가 한 귀로 나간다. 디테일은 놓쳤겠지만 큰 흐름은 머리에 남았다. 전문세 덕분에 내 세계사 지식에 차원이 생겼다. 기억 속에서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던 0차원의 사건 파편들을 시간과 공간 안에서 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표지 출처 알라딘. 너무 좋은 내용을 비용 없이 듣는다고 생각해서 책을 샀다.


전문세는 팟캐스트 중에서도 특이하다. 게스트 없이 허진모 작가 한 사람에게 기대어 진행한다. 허진모 작가도 신기한 사람이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자신이 전공한 역사 앞뒤 500년쯤 진행하다가 시간과 공간 둘 중 하나를 포기했을 것이다. 허 석사는 어느 시대를 이야기하든 거침이 없다. 공부를 얼마나 했길래 저렇게 아는 것이 많은지 궁금할 정도였다. 그러다 어느 화에 허 석사 대학원 시절 이야기가 나오며 궁금증이 풀렸다. 그는 대학원을 오래 다녔지만, 온갖 역사에 발만 담그느라 정작 자신의 연구를 정하지 못했다고 했다. 학위를 받으려면 한 주제를 깊숙이 알아야 하는데, 관심 분야가 너무 넓어 연구를 채 끝내지 못한 것이다. 


팟캐스트 초창기에는 짧은 가방끈 탓에 비판도 많이 받았다고 했다. 사학계든 역사 덕후 커뮤니티든 유사역사학으로 골머리를 앓은 지 오래되었으니, 스스로를 ‘취미사학자’라 소개하는 ‘석사 전공자’는 환영은커녕 신고나 안 당하면 다행이다. 허 석사 본인조차 언젠가 대중 강연을 할 줄 알았다면 젊은 시절 눈 딱 감고 박사 논문을 냈을 것이라 했다. 마음고생을 알 법도 했다. 




허 석사의 사연을 들으며 내가 그의 처지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허 석사가 공부한 역사 지식만큼 과학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나 또한 깊이 연구하는 길 대신 넓게 아는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유사 학문을 배척하는 분위기도 비슷하다. 생물학은 다른 자연과학보다 진입장벽이 낮다. 만만해서 그런지 유사과학 진영에서 도전도 많이 받는다. 이런 상황이니 내 전문성을 의심할까 걱정이 든다. 고백하건대 제일 의심이 깊은 사람은 나 자신이다. 글을 쓸 때마다 두렵다. 연구자라면 누구나 알만한 기초 상식조차 틀렸을 것 같다. 


그럼에도 전문가와 박사는 다르다. 박사 학위는 스스로 연구를 할 수 있다는 증명일 뿐이다. 오늘날의 박사 학위는 소지자가 알고있는 지식의 넓이를 증명하지는 않는다. 연구란 지금까지 없던 지식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 시대의 연구는 아주 협소하다. 세상 모든 학자들이 곡괭이를 들고 지식의 광산을 파내려간다고 하자. 모두의 노력 덕분에 산은 뒤집어지겠지만 각자는 한 사람 들어갈 너비의 땅굴만 팠을 뿐이다. 


사진 출처 픽사베이


새로운 땅굴을 파는 것이 연구라면, 광산에 가보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지도를 만드는 것이 지식 커뮤니케이션이다. 곡괭이를 잘 휘두르는 것과 땅굴 지도를 만드는 데 필요한 전문성은 겹치면서도 조금 다르다. 연구에 가장 필요한 자질은 끈기와 회복 탄력성 같다. 이 사람들은 바깥 사람들이 상상하지 못할만큼 실패하고 다시 일어서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연구를 이해한 후 쉬운 말로 옮기는 데는 쓸데없는 호기심과 오지랖이 필요하다. 어떤 호기심은 연구에 오히려 해를 끼치니, 한 걸음 물러서서 해결하는 것이 낫다. 


땅을 파 본 사람은 경험을 토대로 지도를 쉽게 그릴 것이다. 땅을 판 경험이 많을수록 지도도 잘 그릴 것이다. 중요한 점은 땅파기가 지도그리기보다 훨씬 중요하며, 땅파기와 지도 그리기를 동시에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젊은 연구자가 연구중심대학에 임용되고 싶어하는 이유에는 연구중심대학의 강의 부담이 더 적기 때문도 있다.    


다시 내 이야기로 돌아와서, 곡괭이질을 그만두기로 했으니 지도라도 열심히 만들어야 한다. 다루는 주제가 크고 보편적일수록 디테일은 연구자의 동료들에게 맡겨야 한다. 내게 필요한 능력은 흐름을 읽고 해석하는 것이다. 자료를 찾고 소화한 후 자신만의 글을 쓸 때 커진다. 책이나 논문을 아무리 많이 읽더라도 읽기만 해서는 생각이 늘지는 않는다. 능동적인 사유를 하기 위해서는 손가락을 움직여 문장을 만들어야 한다. 원체 아는 것 많은 허 석사조차 전문세를 위해 자료를 준비하고 팟캐스트를 진행하며 새로운 지식과 사유를 찾았을 것이다. 


내가 전문세를 좋아하듯, 언젠가 날 좋아하는 독자가 생겨나리라 믿어야 한다. 유명한 박사나 교수를 찾는 사람은 애초에 이 곳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이곳에 온 사람들은 나를 느슨하게 믿으며, 학력 대신 글의 내용으로 나를 판단할 것이다. 같잖은 학력을 내세워 허풍 가득한 글을 써서는 안 되겠지만, 익명의 독자에 대한 막연한 공포감이나 가면 증후군(imposter syndrome)으로 글쓰기를 포기해서도 안 된다.




커버 출처 unsplash. Trinity College Dub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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