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크로키 한 달 정산

by 캬닥이

새해부터 크로키를 시작했다. New Masters Academy에서 제공하는 유튜브 동영상을 참고한다. 총 25분짜리 크로키 동영상이 300편은 넘게 있다. 매 동영상마다 모델 사진이 1·2·5·10분씩 나오고 바뀐다. 제한 시간 동안 재빨리 모델을 그려내면 30분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1월 매일 동영상 한 편어치를 그렸다. 한 달이 지나서 크로키북 한 권을 다 썼다.


캡처.JPG https://www.youtube.com/user/NewMastersAcademy/playlists


한달 내내 재미있지는 않았다. 사실 크로키를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슬럼프가 왔다. 그림 실력이 늘고 싶어서 시작했는데 도무지 늘지 않았다. 크로키를 계속할지 고민했다. 일기를 쓰고서 ‘열정 없는 매일 연습’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한 가지 일을 꾸준히 하면 좋다는 걸 누가 모를까. 그럼에도 사람들이 중도에 포기하는 이유는 꾸준히 연습해도 실력이 는다는 확신이 들지 못하거나, 지금 하는 연습보다 더 효율적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미련 때문이다.


두 가지 핑계는 연습 앞에 무릎 꿇게 되어 있다. 꾸준히 해도 실력이 늘지 않았다면 오래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크로키를 일주일 하고서 실력이 늘지 않았다고 투덜대자 반려는 일주일에 얼마나 늘기를 바랐나며 코웃음을 쳤다. 그 말 때문인지 몰라도 나는 첫 슬럼프를 누르고 꾸역꾸역 크로키를 그렸다. 다음 주쯤 되니 크로키를 그리는 과정에 재미가 붙었다. 손을 빠르게 움직이거나 보이지 않던 세부 사항을 찾는 것은 물론, 동영상에 나오는 클래식 음악이며 모델의 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도 감상하게 되었다. 재미를 느끼는데도 시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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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 당 30초에서 1분. 왼쪽이 오른쪽이 되기까지 한 달이 걸렸다.


두 번째 핑계도 반박 가능하다. 무언가를 숙달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그 일을 하는 것이다. ‘어떤 일이든 실력을 향상하는 더욱 효율적인 방법이 존재한다’는 믿음은 현대인에게 더욱 강력하다. 마음만 먹으면 어떤 정보든 얻을 수 있는 세상이다. 무식하게 연습할 시간에 인터넷을 검색하든 서점에 가든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내면 훨씬 빠르게 실력이 늘 것 같다. 하지만 보고서를 쓰는데 언제까지 자료 조사만 할 수 없는 법이다. 초반에 방향을 잡기 위한 정보 찾기는 중요하지만, 한 번 방향을 잡았으면 우직하게 몸에 익혀야 한다.


제약 회사 입사 후, 학교에서도 해본 적 없던 실험을 해야 했다. 플라스크에서 다음 플라스크로 세포를 옮기는 일이었다. 액체를 옮기는 일부터 일회용 물품을 뜯는 일까지 모두 낯설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실험이 빨리 손에 익을지 고민했다. 집에 일회용 플라스크나 튜브를 가져가서 한 손으로 뚜껑을 열고 닫는 연습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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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포 배양 실험 중에는 실험 용기 뚜껑을 왼손만 써서 열어야 할 때가 많다. https://www.corning.com/


모든 일은 시간이 해결했다. 회사에 일이 많아 신입사원의 곰손이라도 당장 실험에 투입해야 했다. 나는 실험 연습을 할 틈도 없이 실전에 들어갔다. 몇 달이 지나자 서투르던 손도 제법 능숙하게 세포를 옮겼다. 이번에도 역시 실험을 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실험을 하는 것이었다.


세상 모든 일이 마찬가지다. 그림을 잘 그리는 가장 빠른 방법은 그림을 많이 그리는 것이다. 작법서를 뒤지거나 ‘그림 잘 그리는 법!’ 따위 제목을 단 유튜브를 보는 일은 곁따르는 일이다. 좋은 스승에게 조언을 듣거나 다른 사람의 피드백을 받는다면 물론 좋겠지만 그마저도 혼자 꾸준히 이뤄온 내공이 있을 때 더 값지다. 일단은 홀로 꾸준히 해야 한다. 그 시간을 줄일 방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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