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갈아내고 나를 깎는다

사랑하고 미워하던 사포질

by 캬닥이

사포의 굵기는 숫자로 표시한다. 숫자가 커질수록 곱다. 철물점에서는 80번부터 2000방사이 사포를 판다. 100방 사포와 1000방 사포는 둘다 같은 말로 불러도 될까 싶을 만큼 다르다. 하나는 모래밭을 굳혀놓은 느낌이면 다른 하나는 철로 된기기에 검은 페인트를 씌운 질감이다. 2000방을 넘어가는 사포는 모형 전문점에 있다. 이쯤 되면 종이와 구별되지 않는다.


KakaoTalk_20200217_085642431_02.jpg 순서대로 220-400-1000-1500


연마는 힘들고 지루한 과정이다. ‘연마’의 두 번째 뜻이 괜히 ‘힘써 배우고 닦음’이 아니다. 숫자가 작은 사포에서 시작해 점점 높은 사포로 나아가야 한다. 400방에서 800방을 지나 1000방을 쓰는 식이다. 1000방을 갈다가 400방으로 돌아가는 일은 이전 노동을 날리는 짓이다. 전단계에 들인시간은 거친 사포를 들이대는 순간 하얀 가루로만 남는다. 하지만 흠집은 항상 마지막 단계에 보이기 마련. 보드라운 사포로 표면을 다듬다가도 도저히 못 덮을 흠집이 보이면 거친 사포로 바꿔 들어야 했다.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처음부터 다시 갈아내는 일은 어리석어 보이지만, 귀찮다고 완성도를 포기하는 일이야말로 멍청한 짓이다.


사포질의 기원은 중학생때 본 건담이었다. 한밤중에 케이블 채널에서 틀어주던 건담은 알고 보니 장난감 파는 만화였다. 거금 15,000원을들여 작은 건담 프라모델을 샀다. 프라모델은 재밌었지만 단점이 있었다.완성하면 예쁜 건담이 하나 생기지만 ‘건담 만드는 과정’은 끝났다. 건담보다는 건담 만드는 과정이 더 좋았다. ‘건담 만드는 과정’을 늘리기 위해 예쁜 건담을 포기했다. 표면을 거친 사포로 갈아내고서 은색 도료를 발라 벗겨진 부분을 만들고, 무광 붉은 도료를 덮어 녹을 씌웠다. 플라스틱 우유통을 잘라서 베란다에서 흙을 가져와 담았다. 여기에 무릎 꿇은 건담을 꽂아 버려진 건담을 만들었다.


머지않아 건담은 빼고 ‘만드는 과정’만 즐기게 되었다. 남이 만든 모형을 돈 주고 사는 대신 미술 재료를 구입해 뼈대부터 시작했다. 프라모델은 칼만 갖고 다듬어도 상관없지만 조형에서 연마는 반드시 지나야 하는 관문이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고 조형의 디테일은 연마에 있다. 손만으로는 직선도 직면도 못 만든다. 어떤 재료를 쓰든 손으로 주무르는 이상 지문이라도 남기 마련이다. 그럴 때면 재료를 충분히 굳히고 연마 단계로 넘어가야 했다.


imgp2006_playkids55.jpg 중학생 때 만든 게임 캐릭터. 지점토


‘만드는 과정’의 모든시간을 사랑하지만, 사포질만큼은 안 할 수만 있다면 넘겼을 것이다. 가는사포를 쓰면 갈아도 갈아도 티가 안 난다. 굵은 사포를 함부로 쓰면 얼굴에 코가 사라진다. 사포질을 하는 동안 분진이 폐로 들어오고 집은 먼지 구덩이가 된다. 모든작업을 방에서 해도 사포질만큼은 베란다로 나가서 했다. 바닥에 앉아 손가락만한 외계인 팔뚝을 갈고 있으면 어깨와 허리가 저절로 굽었다. ‘만드는 과정’에 쓰이는 시간은무서울 만큼 빨리 갔다. 두 시간 세 시간 같은 자세로 사포질만 하다보면 내 목도 만들고 있는 외계인 피규어처럼 뽑아서 바닥에 두고 싶어졌다.


53BE7E3D3702390026.jfif 무거운데 무게중심이 안 맞아 부서진 프로토스 광전사 피규어. 지점토


팔.JPG 연마 전 조형 과정. 슈퍼스컬피


사포질을 하는 내내 장인정신과 다음 단계를 넘어가고 싶은 근질거림 사이에서 고민했다. 타협은 보통 사포가 다 떨어질 즈음 일어났다. 더 이상 쓸 사포가 없다고 먼지를 털어내고 철물점까지 갔다 오는 일은 ‘만드는 과정’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연마를 끝내고 도색까지 마친 작품을보고 있으면 뿌듯하면서도 아쉬운 점이 보였다. 문제는 거의 연마에 있었다. 저 부분 사포질 조금만 더 했으면 진짜 군복처럼 보였을텐데. 여기는 금속이라 매끄러워도 모자란데 올록볼록하네. 귀찮다고 완성도를 포기하는 멍청이는 내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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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마 과정/연마가 부족해 아쉬웠던 두 작품


만들기가 취미였던 시기는 대학생 시절에서 끝났다. 회사와 대학원을 들어가면서는 시간에 쫓겨 만들 틈이 없었다. 요즘에서야 여유가 나서 뭐라도 만들어보려 했다. 시간과 통증과의 싸움인줄만 알았던 연마도 자본이 들어가니 빠르고 편해졌다. 오랜만에 사포질을 하려니 대학원 연구실에서 쓰던 로터리 툴이 떠올랐다. 로터리 툴은 일종의 드릴이다. 드릴 비트(드릴에 부착하는 구멍 뚫는 날) 대신 톱이나 조각날을 장착할 수 있다. 취미용 로터리 툴을 사서기본 부품에 양면 테이프로 사포를 붙였다. 손으로 5분은 잡고 문질렀을 연마 과정이 10초면 끝났다. 집에는 산업용 방독면도 있다. 미세먼지 많은 날 자전거 타겠다고 사서 쳐박아둔 물건이다. 방독면을 쓰고 화장실에서 사포질을 하니 동거인의 호흡기는 몰라도 내 기관지는 지켜냈다. 인터넷 너머 돈 많은어른들은 집에 환기구 달린 작업실을 따로 둔단다. 취미에 돈과 시간을 쏟아붓고도 불안할 것 없는 사람들이 샘난다. 자본과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생길 때까지, 내게 연마는 완전히 사랑할 수만은 없는 시간이다.



KakaoTalk_20200213_181350807_01.jpg 그러나 기계 연마가 가능한 작품은 다면체 주사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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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김에 시계 스트랩에 구멍도 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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