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체 활용 엽편 n부작 - 3
위 교수는 비서가 인쇄해 준 연구실 학생 명단을 훑었다. 연구실 직통 수화기를 들어 허 조교를 교수 사무실로 불렀다. 수화기를 놓자마자 허 조교의 노크 소리가 들렸다. 위 교수는 허 조교를 책상 맞은편 의자에 앉혔다.
“자네에게 내 장인에 대해 말한 적이 있던가? 평생을 건축업에 몸담으신 위인이시네. 우리 학교 도서관도 그 분이 다 지으신 것이나 다름없지. 다들 도서관 갈 때마다 그 분 생각을 하면 좋겠어.”
허 조교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인다.
“그 분이 엊그제 길을 가다가 그만 덤프 트럭에 치였지 뭔가. 알고 보니 규정 무게보다 더 많은 짐을 싣고 있었나봐. 그런 걸 과적이라고 하지 않나. 과적을 했으니 브레이크를 걸어도 멈추지가 않았겠지.”
허 조교는 최선을 다해 아랫입술을 내밀고 눈을 찌푸린다.
“지금 우리 학교 병원 중환자실에 계신다네. Rh+AB형인데, 가족들 중 맞는 혈액형이 없다고… 평생을 선하게 살아오신 분이라네.”
허 조교는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 고개를 내린다. 오늘 허 조교는 회색 줄무니 니트를 입고 왔다.
“자네는 이런 이야기를 들어도 할 말이 없는가?”
“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냐는 말일세.”
허 조교는 자신이 AB형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혈액형 심리학도 한 물 간 시대다. 생각해보니 학생증에도 혈액형이 나와 있다. 학교 행정이 허 조교 신입생 때 입력한 생체정보를 8년 간 갖고 있다가 지도교수에게 바쳤나 보다.
“자네 아직 서른도 안 되었지 않은가. 내 찾아보니 젊은 사람일수록 헌혈을 하면 혈색소가 재생되어 건강해진다고 하던데.”
교수는 제자의 대답을 기다린다. 허 조교는 고개를 숙이고 경우를 계산한다.
상황을 빠져나가는 방법은 쉽다. 빈혈이 있다거나, 적혈구 수치가 낮아서 헌혈을 할 수 없다고 말하면 위 교수라고 더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거절을 빌미삼아 AB형 학부생을 찾아오라 하겠지만. 피를 달라고 설득하는 것은 허 조교의 몫이다. 그렇다고 눈 딱 감고 헌혈을 할 수도 없다. 허 조교는 앞날이 창창한 대학원생이다. 선배들 졸업 연수를 보면 5년은 더 다녀야 한다. 대학원을 다니는 동안 위 교수 장인에게 바친 피 한방울이 백혈병에 걸린 위 교수 조카의 골수가 되었다가 올해 고등학교에 들어갔다는 위 교수 딸의 의대 입학을 위한 카데바가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선생님, 헌혈의 집 운영 시간이 근무 시간과 맞지 않을 것입니다. 확인하고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허 조교는 전일제 대학원생이다. 학기 초에 사인한 계약에 의하면 매일 근무 시간을 지키는 대가로 한달에 한 번 일곱 자리가 안 되는 장학금을 받는다.
“그것은 걱정 말게. 자네가 헌혈을 한다고 하면 시간을 내어줌세. 지금껏 연구를 열심히 해 왔으니 쉬는 시간도 있어야지.”
허 조교는 오늘은 중요한 실험이 있다고 말하려다 위 교수 장인이 오래 살 가능성을 놓칠 뻔 했다. 대신 장학금 계약 내용이 ‘하루에 여덟 시간 이상 연구와 공부에 전념한다’임을 기억해냈다.
“선생님, 저는 제 시간을 연구에 쓰고 싶습니다.” 허 조교는 말을 뱉고 교수의 안색을 살폈다. 위 교수 표정이 살짝 변한 것 같았다.
“자네 지난주에 마르셀로의 에스코트를 해주지 않았나.”
마르셀로 교수는 위 교수 연구실이 연구하는 분야의 대가였다. 허 조교는 마르셀로 교수가 학교에 왔을 때 강의실을 예약하고 무선 마이크를 준비했다. 세미나와 점심 식사가 끝난 후에는 마르셀로 교수를 데리고 학교 박물관과 초대 총장 기념관을 돌며 전날 외운 학교의 역사를 설명해주었다. 캠퍼스 투어 후에는 술 좋아하는 마르셀로 교수의 취향에 맞춰 막걸리 잘 하는 전집에서 저녁을 대접했다. 술에 취해서도 자기 논문을 자랑하던 마르셀로 교수를 부축했다. 영어를 알아듣는 택시를 잡아 숙소로 보냈다.
“내 자네의 탐구심과 연구 정신을 아주 높이 사네. 하지만 이기적으로 자기 연구만 하는, 그런 사람 나는 내 밑에 두고 싶지 않아. 마르셀로의 에스코트를 자원했을 때 나는 자네의 배려심, 봉사 정신에 감탄했었네. 더군다나 이 일은 해봐야 한 시간도 안 걸리지 않겠나”
“선생님, 헌혈을 하면 시간도 걸리지만 피도 줄어듭니다.” 허 조교는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영화표를 얻지 않는가. 자네가 챙겨도 못 본 척 하겠네. 근무 시간을 빼서 부가적인 이득이 생겼지만 모른 척 해주겠다는 말이네.”
허 조교는 5년 안에 카데바가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공짜 영화를 이겨냈다. 위 교수에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곳은 교수 사무실. 위 교수가 지배하는 공간에서 교수의 말을 듣고 있자니 피는커녕 간과 쓸개마저 다 줘야 할 것 같다. 허 조교는 자신을 내리누르는 공기 속에서 답을 찾는다. 증여가 아니라 거래를 하자.
“영화표를 받겠습니다. 대신 영화를 볼 시간도 주십시오. 마르셀로 교수님 에스코트 날보다 일찍 돌아오겠습니다.”
위 교수는 제자의 일탈을 흔쾌히 허락했다. 허 조교는 그 길로 건물을 나왔다. 핸드폰으로 요즘 개봉한 영화를 검색하다 가로수와 부딪쳤다. 머리를 박는 순간 허 조교는 제 시간과 피를 잃었고, 위 교수는 손해 없이 장인을 구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다. 따지고보면 잃은 시간은 곧 지켜낸 시간 아닌가. 적어도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되지 않았다. 다음 번 들어오는 신입생이 AB형이길 바라며 허 조교는 헌혈의 집 문을 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