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국에도 출근하는 생명과학 연구동에 한 대학원생이 살았습니다. 어느 날 대학원생은 실험을 하다가 생쥐 한 마리가 복도를 달리다 연구실 뒷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생쥐는 애기장대를 다듬고 있는 대학원생에게 애처롭게 말했습니다.
"나무꾼님, 나무꾼님, 저를 숨겨주세요! 사냥꾼에게 쫓기고 있어요."
"나는 나무꾼이 아니란다. 그리고 사냥꾼도 사냥꾼이 아니라 옆 랩 대학원생이란다."
"저를 도와주면 좋은 일이 생길 테니 일단 숨겨주세요."
대학원생은 비어있는 화분 하나를 찾아 생쥐를 넣고 실험대에 올려두었습니다. 머지않아 못 보던 대학원생이 실험복을 입고 뛰어와 물었습니다.
"선생님, 여기 혹시 마우스 한 마리 못 보셨습니까? 저희 랩에서 케이지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쥐가 다 도망갔습니다."
"복도에서 뭐가 308호 쪽으로 가는 것 같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실험복을 입은 대학원생이 꾸벅 목례를 하고 복도로 사라졌습니다. 발소리가 들리지 않자 화분에 있던 쥐가 나와 말했습니다.
"나무꾼님이 제 목숨을 사려주셨으니 소원 하나를 들어드리겠습니다."
대학원생이 말했습니다.
"연애를 해야겠다. 5년 간 연구실에 있는 동안 연애 한 번을 못해보았다."
쥐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습니다.
"오늘 밤에 3층 세미나실에 가보세요. 그곳에서 학부생이 레포트 수정을 하고 있을 거예요. 토론하는 동안 레포트 하나를 숨겨두세요."
"레포트를 가져가라고? 그래 봐야 다시 뽑으면 되잖니"
"나무꾼님네 지도교수님은 컴퓨터를 쓸 줄 몰라 펜으로 코멘트를 쓰시니, 첨삭본을 가져오면 집에 가지 못할 거예요. 절대로 학기가 끝날 때까지 첨삭본을 돌려주면 안 돼요."
쥐는 화분을 빠져나와 대학원생을 향해 윙크를 하더니 테이블 아래로 도망쳤습니다.
밤이 깊고, 대학원생은 세미나실에 가보았습니다. 원래 랩 미팅을 하는 세미나실에 학부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노트북을 켠 채 디스커션을 하고 있었습니다. 대학원생은 자판기에서 음료수 몇 캔을 빼서 세미나실에 들어갔습니다. 늦게까지 과제하느라 고생한다며 독려하다가, 제 눈에 가장 예쁜 아이의 레포트를 몰래 집어 연구실에 돌아왔습니다.
의미 없는 토론이 끝나고, 수정 작업을 시작하려고 보니 한 학부생 아이의 레포트가 없었습니다. 레포트가 없어졌다는 말에 다들 열심히 찾아보았지만 사라진 레포트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들 제 과제에 바쁘다 보니 계속 칭얼대기도 난처해진 학부생은 복도에 나와 엉엉 울었습니다. 그 때 대학원생이 나타나 학부생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너는 왜 다른 애들 과제하는데 혼자 울고 있니?"
"교수님 지적 사항 참고해서 수정본을 내야 하는데, 제 첨삭본만 사라져서 과제를 할 수가 없어요."
"우리 교수님 수업 과제는 조교가 첨삭한단다. 나도 조교를 한 적이 있으니 도와줄 수 있는데, 일단 우리 연구실로 와 볼래?"
대학원생은 울고 있던 학부생을 다독이며 아무도 없는 연구실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러고서는 기억한 첨삭본 내용에다가 최신 연구 내용을 덧붙이면서까지 레포트 수정을 도와주었습니다. 밤을 새우며 함께 글을 쓴 덕분에 그럴듯한 수정본을 제출할 수 있었습니다.
"조교님 덕분에 레포트를 썼으니 밥이라도 사드릴게요."
"나는 조교가 아니니 오빠라고 불러도 된단다."
대학원생은 이후로도 몇 번 학부생을 만났습니다. 그때마다 최선을 다해 과제를 도와주었습니다. 몇 주가 지난 뒤, 학부생이 찾아와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조교님, 교수님이 레포트를 낼 때 저번 첨삭본도 같이 제출하래요. 어떡하죠?"
"첨삭본 안 내면 어떻게 되는데?"
"괘씸죄로 C부터 시작한대요. 이번에 재수강 뜨면 언제 이걸 또 써요."
"... 그러고 보니 복도에서 종이 무더기를 본 것도 같은데..."
대학원생은 학부생의 우는 모습에 마음이 약해졌습니다. 서랍을 주섬주섬 찾는 척을 하다가 학부생의 첨삭본을 주었습니다.
"역시 대학원생 변태새끼. 인생 이렇게 살지 마세요."
학부생은 첨삭본을 빼앗아 북북 찢고서 사라져버렸습니다. 그제야 대학원생은 며칠 전 쥐가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절대로 학기가 끝날 때까지 첨삭본을 돌려주시면 안 돼요."
대학원생은 엎드려 연구실 테이블 아래를 찾아보았습니다. 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