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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캬닥이 Aug 02. 2020

무례한 감수성이 주는 불편함

니코스 카잔차키스 <스페인 기행> 감상평

10년쯤 전,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가 유행했습니다. 그 시절 <그리스인 조르바>는 바쁜 현대인의 '인생 책'으로 꼽혔습니다. 학생 때 자주 가던 병원의 원장실 책장에도 <그리스인 조르바>가 있었습니다. 대학에 들어온 후 <그리스인 조르바>를 빌려 읽었습니다. 책이 인기있는 이유를 도저히 알 수 없었습니다. 제 기억에 조르바는 자기 꼴리는 데로 사는 인간이었고, 조르바처럼 산다고 행복할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책을 꾸역꾸역 읽고서 다시는 카잔차키스의 책을 읽지 않았습니다. 


독서 모임에서 읽은 <스페인 기행>도 10년 전 읽은 <그리스인 조르바>과 비슷했습니다. 카잔차키스의 감수성은 현대 2-30대 한국인이 공감하기에는 너무 무책임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과 책에 대해 이야기하며 책에 가졌던 나쁜 인상이 '작가와 우리는 다른 세상 사람'임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바뀌긴 했습니다. 


표지 출처 알라딘(www.aladin.co.kr)


작가는 '아프리카'를 격정적인 스페인 정신을 표현하는 데 사용합니다. 마을의 조각상을 보며 '기독교 금욕주의를 새기려 했으나 입술 두꺼운 야만스러운 아프리카 조상의 피가 손을 이끌었다(p23)' 라고 묘사합니다. 책 속에 나오는 스페인 여성은 요부이거나, 돈 후안을 만든 재료이거나, 도시를 정복한 후 얻는 전리품입니다. 그들은 '남성의 수식어'일 뿐입니다. 인종과 여성을 사용하는 무딘 감수성을 시대의 한계라고 감안합시다. 그러나 작가는 스페인 사람(남성)마저 대상화합니다. 카잔차키스는 '진정한' 스페인 사람에 대해 길게 늘어놓지만, 그가 말하는 스페인 사람은 실제 스페인 사람이 아니라 작가 본인의 내면을 표현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카잔차키스는 스페인에서 만난 광경과 사람을 소재 삼아 자신의 감상을 말합니다. 그의 '소재 삼기'는 현대 독자의 눈에 무례합니다. 작가의 눈에는 사람들의 생명과, 목숨을 건 전쟁, 또는 그것의 무익함이 모두 멋진 문장을 만들어내기 위한 재료에 지나지 않습니다. 투우를 보며 소의 헛된 몸부림을 실감나게 묘사하고서는 그것이 '죽음을 통해 사랑을 영원하게 만드는 것(p171)'이라 감탄하고, 내전으로 황폐해진 톨레도를 보고서는 '인간은 약탈된 도시의 광경을 야만적인 기쁨으로 즐긴다(214p)'고 고백합니다. 


그렇기에 문장은 아름답고, 장면은 인상적입니다. 스페인 사람의 입을 빌려 말하는 전쟁도 실감납니다. 하지만 독자는 마냥 작가의 글에 감탄하지도, 찬동하지도 못합니다. 모든 것을 관조하는 작가의 태도 탓에 스페인의 광경과 열정을 읽었음에도 찝찝함만 남을 뿐입니다. 옮긴이 말에 따르면 <스페인 기행>은 스페인어로 번역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옮긴이는 스페인 내전을 독재자 프랑코의 입장에서 썼기 때문이라 설명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책 전체가 스페인 사람들이 읽기에 모욕적입니다.


책은 저에게 불편함과, 불편함에 대한 불편함을 남겼습니다. 한 문장, 한 문장을 읽으며 기분이 나빠지면서도, 이 정도 감상을 수용하지 못할만큼 마음이 닫혀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나마 모임에서 다른 사람들의 감상을 들은 덕에 놓쳤던 지점을 다시 볼 수 있었습니다. 나쁜 인상을 버리고 읽을 때야 아름다운 감상과 사색이 보였습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좋아하는 사람은 여전히 많을 것입니다. 책장 맨 앞에 <그리스인 조르바>를 두었던 의사 선생님. 저보다 윗 세대, '워라밸' 개념도 없던 현실을 버티며 자유를 꿈꾸던 분들. 저에게 그들의 조르바를 부정할 자격은 없습니다. 하지만 불편함을 반성하는 것과는 별개로 앞으로 카잔차키스의 책을 더 읽지도 않을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자유란 모두가 지키는 규칙 속에서 찾는 자유입니다. 제가 만약 기행문을 쓴다면, 그곳에 사는 사람들도 즐겁게 읽을 내용을 쓰고 싶습니다.



극과 극으로 나뉜 알라딘 100자 평이 재미있었습니다.(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6037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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