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 브론테 <폭풍의 언덕> 소개
인터넷에서 '로맨스 돌잡이' 라는 말을 보았습니다. 청소년기에 읽은 '오만과 편견',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중 하나에 평생 로맨스 취향이 결정난다는 뜻이었습니다. 제가 돌잡이로 무엇을 잡았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네요. <폭풍의 언덕>과 <제인 에어>는 청소년 문고판으로 읽긴 했지만 너무 오래전 일이었습니다. <오만과 편견>은 재작년즈음 재밌게 읽긴 했어요. 이참에 셋 중 무엇이 제 돌잡이일지 궁금해 <폭풍의 언덕>부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판으로 다시 읽었습니다.
<폭풍의 언덕>은 두 저택 드러시크로스와 워더링 하이츠를 배경으로 언쇼 가와 린튼 가 사람들, 언쇼 가의 고아 히스클리프가 엮이는 이야기입니다. 처음 절반은 히스클리프와 캐서린 언쇼의 엇갈린 사랑, 나머지 절반은 캐서린이 죽은 후 홀로 남은 히스클리프의 집착이 주 내용입니다.
돌잡이 로맨스는 캐서린과 히스클리프 사이에 나옵니다. 둘은 오랜 기간 서로를 사랑했지만,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너무 서툴렀어요. 성숙해지기도 전에 엇걸린 사랑은 복수심과 증오로 변합니다. 이 세상에 가장 중요한 존재가 사랑하는 상대이고, 사랑이 역경을 만나 강해지는 무언가라면, 가장 강한 사랑은 서로가 만든 역경에서 피어날 겁니다. 그래서 <폭풍의 언덕>의 로맨스는 극단적일만치 강렬합니다.
<폭풍의 언덕> 속 사랑이 강렬한 이유는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에도 있습니다. 이야기는 두 가문의 가정부였던 엘렌 딘의 입을 빌려 진행됩니다. 엘렌은 자신이 기억하는 두 사람의 말과 행동을 덤덤하게 말하지만, 독자는 캐서린과 히스클리프가 상황마다 어떤 심정이었으며 왜 그렇게까지 행동해야 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묘사 덕분에 작가와 인물 사이의 거리보다 독자와 인물 간 거리가 가깝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1847년에 글을 쓴 작가가 인물에 이렇게 거리를 둘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였어요.
로맨스 돌잡이 결론. <폭풍의 언덕>도 <오만과 편견>만큼 좋았습니다. 단, 후반부 자식 세대 이야기는 사족이었고, 캐서린이 죽는 절반 지점까지가 정말 재미있었어요. (물론 절반 읽었으면 남은 절반은 어차피 읽게 되어 있습니다. 후반부도 후반부 나름으로 얻는 바가 있고요.) 빅토리아 시대 특유의 길고 고풍스러운 묘사, 복잡한 인물 관계 속에서 엇갈리는 갈등, 두 사람의 격정적인 감정이 매력적인 이야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