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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윤 Feb 27. 2018

힘들 때, 꺼내 먹어요

영화 <리틀 포레스트> (2017)


영화 <리틀 포레스트> (2017)     
★★★☆

: 자연이란 드라마, 청춘의 드라마

자료제공 :Daum영화


    

누군가 그러더라.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모두가 주섬주섬 짐을 챙기며 나가는 중이었다. <효리네 민박>, <윤식당>이 이미 히트를 친 상황에서,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센세이션이 되못할 것이라고 말이다. 부분적으론 동감한다. <삼시세끼>, <신혼일기>, <효리네 민박> 등, ‘전원 속 슬로우 라이프의 감동’은 이미 익숙한 것이다. TV 밖이 빠른 음식, 빠른 움직임의 시간이기에, TV 속 예능은 느린 음식, 느린 움직임을 상품화했다. 취업을 위해 승진을 위해 매일같이 바쁘게 사는 삶이 아닌, 한적한 전원에서 말 그대로 잘 먹고 잘 사는 것. 영화 <리틀 포레스트>도 마찬가지다. 우리 것이 될 순 없으나, 우리에게 퍽 익숙한 시간으로 영화가 흐른다.    

 


영리한 로컬라이징


원작 영화 <리틀 포레스트>(2014, 2015)의 미학은 일상의 총체에 있었다. 농사짓고, 밥을 짓고, 음식을 하고, 자전거를 타고 마을을 거닐며, 뽀득뽀득한 흰 눈을 밟는, 주인공 이치코의 일상이 영화를 채웠다. 영화를 움직이는 건 자연의 드라마였고, 이치코의 드라마는 큰 자취 없이 그 자연 속에 녹아들었다. 어머니의 행방이나 친구들과의 관계, 이치코의 갈등이 첨예하게 이어지진 않았다. 되려 마을 사람들의 얼굴, 코모리 마을의 전경, 요리하는 모습 등, 작은 일상이 영화를 수놓았다. <리틀 포레스트 : 겨울과 봄> (2015)의 마지막 시퀀스, 이치코가 무대 위에서 전통춤을 추고, (의상이나 움직임이 그다지 멋있진 않았다만) 영화 내내 보여준 이치코의 평범한 일상이 교차될 때, 그 순간순간이 드라마였고, 영화였음을 느낄 수 있다.


자료제공 :Daum영화

      

임순례 표 <리틀 포레스트>(2017)는 이 자연의 드라마에 청춘의 드라마를 가미했다. 원작 영화에서 잠깐씩 고개를 내밀던 청춘의 고민을 끄집어내어, 자연과 청춘의 고민을 영리하게 엮어냈다. 되는 일 없는 현실에 고향으로 돌아온 혜원(김태리), 농부의 삶을 선택한 재하(류준열), 고향을 떠나고 싶어 하는 은숙(진기주)은 청춘의 개체로서 움직인다. 영화는 혜원의 일상에 집중하면서도 재하와 은숙과의 관계영화적으로 구축한다.


원작이 추구하지 않았던 허구적인 순간들은 통통 튀는 분위기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키코가 부장의 머리를 탬버린으로 연주하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지 않나.) 이 통통 튀는 청춘들의 이야기는 참 맛있다. 세 인물의 관계와 일상에선 이야기의 진진한 맛이 풍긴다. 무공해한 유머와 일상의 작은 재미들로 영화는 자극적인 사건 없이도, 지루하지 않게 이어진다. 예능 <삼시세끼>나 <신혼일기>보다 영화가 더 잘할 수 있는 것, 바로 이야기의 재미는 자연스럽게 안착한다. 소박하지만 밋밋하지 않다.


         

단순한 먹방이 아니라, 쿡방이 아니라     


혜원은 ‘배가 고파서’ 고향으로 내려왔다. 임용고시를 준비하며,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던 혜원은, 인스턴트 도시락을 먹다 말고 고향으로 내려온다. 고향에서 만들어 먹는 수제비, 아카시아 튀김, 떡볶이, 무지개떡, 막걸리, 양배추 샌드위치 등 신선한 요리는 관객의 눈을 즐겁게 만든다. 요리는 눈요깃거리에 그치지 않고, 드라마를 만드는 무공해한 재료로 기능한다. 요리를 만들고 음식을 먹으며 혜원의 고민과 회상은 이질감 없이 곁들여진다. 재하의 술주정을 지켜보며 혜원은 농촌의 삶을 생각하고, 곶감을 말리며 도시로 돌아갈 것을 다짐하기도 한다.


한 영화에 사계절을 담아내다 보니 다소 벅찬감은 있다. 원작의 길고 차분하고 끈질기게 이어지던 농사짓는 시간, 음식 만드는 시간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도.      


자료제공 :Daum영화


무공해한 화면 속에 배우들은 잘 녹아들었더라. 각각의 고유한 맛은 느껴지는데, 무엇하나 이질적인 맛이 없으니 그야말로 별미였다. 특히 문소리의 존재는 영화의 장르를 훌륭히 포장한다. 문소리가 연기한 혜원 엄마는 혜원의 과거 속 인물이지만, 현재의 고민으로 이어지고, 미래의 행동으로 나아가게 하는 중요한 인물이다. 오코노미야키를 특제 요리라고 거짓말하던 익살스러움, 먼저 간 남편을 보고 싶어 하던 얼굴, 어린 혜원을 바라보는 표, 무엇보다 또 다른 인생을 찾아 떠난다던 편지 속 목소리. 문소리는 현재의 타임라인에선 단 한 씬도 등장하지 않, 오로지 회상과 환상으로 등장하면서도, 힘 있게 영화를 감싸 안는다.       

    


익히 듣던 소리인데, 그래도 꺼내 먹어요     


다만 내레이션과 대사에서 익히 먹던 맛이 느껴지는  흠. 청춘의 고민을 담은 혜원의 내레이션과 재하의 대사는 어디서 많이 듣던 것들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SNS의 글귀로, TV 속 조언으로, 멘토링 강연으로 들어왔던 것의 복화술 정도? 자연이란 드라마와 여타 인물들의 서사로 메시지는 충분히 담겼건만, 조언 같은 언어가 양념으로 덧뿌려져, 재료의 고유한 맛을 앗아간다. 토익, 스펙, 자기소개서, 면접 등에 괴로워하는 청춘의 처지에서 봤을 땐, 귀가 닳도록 들어온 말보다, 먼 곳을 가만히 바라보던 눈, 소박함 속에서 행복을 찾던 미소가 더 인상 깊더라.      


자료제공 :Daum영화


흠은 있다만, 그래도 영화는 맛있다. 스크린에 많이 걸려왔던 한국 영화의 얼굴, -피와 폭력과 욕설과 잔인함이 장르를 업고 재생산되어온- 그 얼굴을 떠올리면 <리틀 포레스트>의 말간 얼굴은 갓 딴 채소처럼 신선하면서도 소담하다. 가끔 힘들 때, 지칠 때, 작은 휴식이 필요할 때, 꺼내먹고 싶을 정도로 담백하니 맛있다. 어쩌면 나의 작은 숲은 이 영화가 될 수도 있겠구나. 오래고 꺼내먹고 싶은 자연이란 드라마, 청춘의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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