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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윤 May 11. 2018

우리 지금 만나, 아 당장 만나

영화 <라이크 크레이지>


영화 <라이크 크레이지> (2011)
★★★

: 미끄러진 사랑의 소고, 안톤 옐친의 아름다운 순간 


자료제공 : Daum영화



Love Me like You Do

     

나는 너를 사랑한다네가 즐겨 마시는 커피의 종류를 알고네가 하루에 몇 시간을 자야 개운함을 느끼는지 알고네가 좋아하는 가수와 그의 디스코그래피를 안다그러나 그것은 사랑인가나는 네가 커피 향을 맡을 때 너를 천천히 물들이는 그 느낌을 모르고네가 일곱 시간을 자고 눈을 떴을 때 네 몸을 감싸는 그 느낌을 모르고네가 좋아하는 가수의 목소리가 네 귀에 가닿을 때의 그 느낌을 모른다일시적이고 희미한그러나 어쩌면 너의 가장 깊은 곳에서의 울림일 그것을 내가 모른다면 나는 너의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      


평론가 신형철의 문장으로 시작해보았다. 상대가 즐겨 마시는 커피, 상대의 수면시간, 상대가 좋아하는 가수와 그의 디스코그래피를 안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정보는 누군가의 투 머치 인포메이션(TMI)일 뿐이다. 


하지만 사랑한다고 모든 감각을 공유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다시 말해, 사랑은 ‘너곧나’라는 단언을 주지 못한다. ‘내가 네 취향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네 느낌을 함께 느낀다’로 연결되진 못하는 거다. 사랑이 부족한가? 아님 혹시 공감 능력 결여? 아니, 당연한 순리다. 사람은 본디 타인의 바깥에 서서 타인을 대하는 개체들이고, 이해라는 건 바깥을 옆으로 만들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를 이해한다는 말이 너의 모든 감정의 파고를 느낄 수 있단 소리는 아니다. 온전한 타인이 되는 건, 즉 ‘너는 나, 나는 너’란 관계성은 판타지에 가깝다. 너무 비관적이고 냉소적인가.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 옛날 드라마 <황진이>에서 은호 도령은 “오즉여 여즉오 (吾則汝 汝則吾), 나는 너고, 너는 나”라며 로맨틱하게 고백했고, <다모>의 황보윤은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는 명대사를 남겼다. 이는 어쩌면 ‘너곧나’가 불가능한 현실에 환상을 주입하는 문법 더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사랑은 무엇인가. 


자료제공 : Daum영화

     

다시 신형철의 문장을 따라가 보자.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 너를 사로잡고 있는 느낌을 알 수 있고 그 느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 너에게 필요한 느낌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고 그 느낌을 너에게 제공할 수 있다그렇게 느낌의 세계 안에서 우리는 만난다서로 사랑하는 이들만이 느낌의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다.” 이것이 사랑에 대한 가장 현실적인 진단이 아닐까 싶다. 서로의 바깥에 서 있는 수많은 개인들이 느낌의 세계에서 만나는 것. 느낌이란 바운더리 안에서 서로의 곁에 서는 것. 그 기적적인 교류. 신형철은 그것을 사랑이라 명명한다. 영화 <라이크 크레이지>에도 이 진단을 적용해 볼 수 있다.  

    

미리 말해보는 진단명, 느낌의 공동체에서 미끄러진 남녀의 스냅사진.  

        


일상과 사랑, 사랑과 일상     


영화는 마치 남의 사진첩을 몰래 엿보는 사람인 양, 관객을 대접한다. 사진을 이어 붙인 것 같은 짧은 컷들이 연인의 서사를 펼쳐낸다. 애나(펠리시티 존스)와 제이콥(안톤 옐친)의 만남, 미친 듯한 사랑, 이별과 위기, 재회와 또다시 찾아온 위기, 결혼과 이별, 재회와 결말까지. 흔한 말로는 ‘롱디 커플이 힘든 이유.jpg’라고 영화를 정의 내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영화는 단순함으로 치닫지 않는다. 스냅사진 같은 순간순간의 연결로 사랑이 왜 힘든지, 사랑의 조건이 무엇인지를 추적한다. 의도된 분절로 섬세한 맛은 덜하지만, 감정과 변화는 물 흐르듯 전달된다. 


자료제공 : Daum영화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애나와 제이콥을 밀어 넣은 영화는 그들의 감정과 변화를 따라가기 시작한다. 순간의 열정을 연장하고 싶었던 애나의 선택은 그가 미국 비자를 얻지 못하는 불가피한 결과로 이어졌고, 이로 인해 애나와 제이콥은 ‘롱 디스턴스’란 상황에 부닥치게 되었다. 처음엔 연락이 엇갈린다. 다음은 거리감이다. 일상을 공유할 수 없기에 생긴 거리감. 이로 인한 작은 아쉬움과 실망이 차곡차곡 쌓여 두 사람은 이별한다. 하지만 얼마 안 가, 과거의 ‘미친 듯한’ 사랑을 잊지 못해 서로를 찾는다. 사랑의 조건은 이별과 재회를 거듭할수록 차츰 드러난다. 영화가 내세운 조건은 두 가지다. 하나는 애나의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제이콥의 공간이다.  


자료제공 : Daum영화

   

첫 이별의 순간 애나는 제이콥에게 그들의 추억을 기록한 책자를 선물한다. 반면 제이콥은 애나에게 그가 만든 의자를 선물한다. 애나는 제이콥의 시간에 그들의 추억을 각인시킨 것이고 제이콥은 애나의 공간에 그의 존재를 각인시킨 거다. (애나가 제이콥과의 시간을 연장하려 하고, 제이콥이 애나의 부모님을 만나며 애나의 공간에 들어서는 것 역시 같은 장치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애나와 제이콥의 시공간은 미국-영국의 시차와 거리만큼 벌어진다. ‘나는 너, 너는 나’가 가능했다면 시공간이 무슨 대수겠나. 하지만 ‘나는 나, 너는 너’라는 현실적인 상황에서 애나와 제이콥은 점차 멀어지게 된다. 애나와 재회한 제이콥의 대사는 영화가 말하는 사랑의 조건을 압축하여 드러낸다. “내가 진짜 네 삶의 일부 같지 않아. 그냥 휴가 온 느낌이야.” 

    

애나가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에디터로 일하며 일상을 영위하고, 제이콥이 가구 주문을 받고 동료들과 이야기하며 일상을 영위하는 동안, 두 사람은 느낌의 공동체에서 만날 수 없다. 상대가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누구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멀어진 시공간 때문에 알 수 없음이다. 이들은 유리되었다. 그리고 ‘라이크 크레이지’, 미치도록 사랑했던 그때의 기억에서 이유를 찾는다. 결국 결혼이란 이름으로 사랑을 잇고자 하지만 이 역시 순탄치 못하다. 물리적, 정서적 거리가 멀어진 상황에선 결혼이란 묶음도 무용지물이다. 시공간이 멀어지면 미치도록 사랑했던 기억도, 결혼이란 공적인 연결도 힘을 쓰지 못한다. 애나는 애나의 삶을, 제이콥은 제이콥의 삶을 살아가는 게 더욱 행복해 보인다.  


    

순간을 기록하다     


결국, 애나는 다시 제이콥에게로 향한다. 우여곡절 끝에 미국에 발을 디딘다. 첫 엇갈림의 스냅사진이 겹쳐진다. 제이콥은 꽃을 들고 공항으로 향하고, 그때와 달리 애나는 무사히 제이콥의 꽃을 받고, 그의 집으로 향한다. 마침내 시공간이 하나로 합쳐지고 서로를 마주한 상황. 그곳에서 감독은 돌연 영화를 끝내버린다.


자료제공 : Daum영화

      

얼얼한 듯 벙찐 객석. 그 사이로 여운을 느낄 새도 없이 질문 하나가 솟는다. 애나와 제이콥은 이제 행복할 수 있을까? ‘롱디’라는 장애물이 사라졌으니 미치도록 사랑했던 그때로 돌아갈 수 있을까. 글쎄다. 차곡차곡 쌓인 스냅사진은 서로가 서로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기록하는데. 낙관적인 생각은 안 들더라. 애나는 서로에게 생채기를 냈던 ‘시간’을 기억할 것이고, 제이콥은 애나가 하고 싶은 일을 못하는 ‘공간’을 의식할 것이다. 이 어긋난 시공간 속, 두 사람은 다시 느낌의 공동체에서 만날 수 있을까. 미치도록 사랑한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고, 미치도록 사랑했기에 그러지 못할 수도 있다. 어쨌거나 결말은 우리 몫이 아니며 감독도 이를 정확히 파악했다.    


자료제공 : Daum영화


순간을 기록하는 것. 미끄러지고 막막할지라도 그 순간을 열거하는 것. 이 영화의 존재 이유다. 애나와 제이콥의 사랑이 그렇고, 안톤 옐친의 얼굴이 그렇다. 설렘을 담은 눈, 흔들리는 눈,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한 당혹스러움. 안톤 옐친의 얼굴은 제이콥의 감정선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스물일곱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한 배우의 얼굴은 순간이 되어 영화에 담겨 있다.      


함께 했던 시공간, 행복했던 시공간, 어긋났던 시공간. 그리고 한 사람의 젊은 순간. 그 모든 건 애나가 만든 책자 마냥 <라이크 크레이지> 속에 담겨 있다. 영화가 끝난 뒤, 그 이후의 삶은 모른다. 짐작해도 소용없다. 그저 지나온 순간들을 충실히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자료제공 : Daum영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느낌의 층위에서 ‘너는 너. 나는 나’인 참 비정한 세상이다. 이 세상 속에서 누군갈 사랑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나로서도 아직 잘 모르겠다. 단 한 가지 확실한 건, 우린 사랑이란 이름으로 타인의 삶 옆에 설 수 있다는 것. 관계의 완성이 아니라도 괜찮다. 느낌의 공동체 속에서 서로를 만날 수 있다는 것. 짧은 순간일지라도 그런 기적 같은 순간이 인생사에 존재한다는 것. 우리,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투박하고 답답해도 그 순간들을 포착한, 영화 <라이크 크레이지>

시공간이 멀어지면 관계는 장담 못하니, 만나고 싶다면 지금 당장 영화와의 거리를 좁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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