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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별빛 Dec 06. 2020

마스크 쓸 땐, 자나깨나 사람 조심합시다!

개망신 제대로 당했을 때 쓰는 영어 표현 "Red in the Face"

멜버른 코로나 확진자 0명.


모두가 염원한 깨끗한 숫자다.
이렇게 되기까지 멜버른은 호주에서도 고립된 도시였다.
타 지역으로 가는 보더가 차단됐으며
집으로부터 5킬로미터 이동제한,
일할 수 있는 직업군은 Worker Permit (일 할 수 있는 허가서)를 지참해야 했고, 불시검문에 이를 증명하질

못하면 9913불 (800만원)의 벌금형에 처해졌다.
하루 단 한번의 운동, 단 한번의 식료품 쇼핑,
모든 건 엄청난 벌금과 함께 사람들의 자유를 앗아갔다.


스테이지 4까지 가면서 가혹한 형벌에 시달리던
멜번리안들은 코로나 확진자 0명.
그 순수한 숫자로 자유를 되찾던 날,
멜버른 프리덤을 외치며 모두 밖으로 뛰쳐나왔다.


나도 헐레벌떡 약속을 잡고 북클럽 멤버들을 만나러 갔다.
주차하고 걸어가는데 도로 하나 사이로
앞서가는 언니가 보였다.
난 근 3개월 만에 보는 그 낯익은 뒷모습이
너무나도 반가워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 언니! 언니!! 언~니~ !!!


격양된 목소리는 차츰 돌고개 음역대로 올라가다
하늘 위로 째지듯 부서졌다.
언니가 어물쩍하더니 가던 발길을 멈추고 뒤돌아섰다.
하얀 벙거지 모자를 쓰고 선글라스에 마스크를 쓴 모습이었다.


” 언니! 와 진짜 오랜만이다..
“ 언니, 주차 이쪽에 했어요? 여기 3시간 프리 파킹 맞죠?”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나의 말에 언니는 아무 말 없이
한참을 쳐다보더니 마스크를 쓰윽 내렸다.
슬로 모션으로 천천히 내려가는 마스크 속으로
언니의 하얀 얼굴이 차츰 드러났다.
나는 서서히 그렇지만 분명히 알았다.
그녀가 생판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어머, 죄송해요. 저는 제가 아는 언닌 줄 알고...”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난처함을 표하는 그때,
그녀의 작지만, 무척이나 또렷한 목소리가

내 귓가를 때렸다.


Sorry ... What??


이런 젠장!!! 그녀는 한국인도 아니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애니메이션이라면 하늘 위로 새 한 마리가 썰렁하게 지나가면  딱 맞을 그 애매하고도 뻘쭘한 상황.


아…. 주춤하던 사이,
그녀는 다시 마스크를 올리고 가던 길을 걸어갔다.


망신, 망신 개망신….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가는 그녀의 서너 걸음 뒤에서
나는 곧 느꼈다.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다는 사실을,
걷고 있지만 이상한 사람이 자신을 쫓아오고 있다는
초초하고 불안한 그녀의 걸음걸이.


옆길로 빠질 수도 없는 길 위에서
그녀 뒤를 종종 걷던 나는 아주 오래전 보았던
 상황별 영어 숙어 100개“ 영어책에

수록된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Red in the Face “


주로 개망신 제대로 당했을 때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자신의 감정을 적절히 표현한 영어문장이다.
지금 딱 이 상황에서 마스크 속 불타고 있는
내 얼굴 그대로!!!


마스크 쓸 땐, 자나 깨나 사람 조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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