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과에 다녀왔다
학교 선생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어머니, 경민이가 시력이 좀 안 좋은 것 같아요. 뒤에 앉으면 칠판 글씨도 잘 안 보인다고 하고요. 가끔 정면으로 안 보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서 칠판을 보더라고요. 불편해 보여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작년에 시력검사 했을 때 0.7-0.8 정도였는데요. 다시 한번 검사를 해볼게요."
나와 남편은 눈이 좋은 편이다. 어릴 때는 아주 멀리서도 간판의 밑에 작게 쓰인 전화번호까지 다 보였다. 차를 타고 가면서 거리의 글자들을 시력검사 판 삼아 누가 누가 더 작은 글씨를 읽나 동생과 시합을 하기도 했다. 2.0까진 아니어도 항상 1점은 넘었는데. 작년에 아이 시력 검사를 하고 벌써 시력이 영점 대라고? 하면서 놀란적이 있다. 안경을 낄 정도는 아니지만 추적관찰을 해봐야 한다고 들었다. 그런데 올해는 그보다 더 낮아졌을 거라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독수리와 매의 자식이 왜 이렇게 시력이 나빠졌을꼬? 매일 보는 넷플릭스 화면이 너무 가까웠나? 어두운 데서도 손에서 놓지 않는 깨알 같은 글씨의 책 때문인가? 밖에 잘 안 나가는 집돌이라 시야가 좁아 멀리 보지 못해서인가? 괜히 혼자 이런저런 원인을 찾아본다.
아이는 칠판 글씨가 요즘 들어 흐릿하게 보인다고 했다. 그러면서 같은 반 아이들 중 안경이나 드림렌즈 끼는 아이들이 되게 많다고 자랑하듯 말해주었다. 드림렌즈를 끼면 자다가 렌즈가 돌아가 엄청 아프다고 했다며, 꼭 엄마가 해주라고 벌써부터 설레발이었다. 또, 누구는 안경을 끼고 나서 여자애들이 뽀로로 같다고 했다는 말투에는 묘한 부러움도 섞여있는 듯했다. 아니, 엄마는 왜 시력이 나빠졌나 걱정되어 냉동실 반찬 뒤지듯 이리저리 원인을 찾아내고 있고만, 얜 안경이나 드림렌즈를 벌써부터 기대하는 건가? 겁 많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아이라 에이 설마 하고 넘겼다.
과잉 진료 덜하고 많이 안기다려도 된다는 안과를 예약했다. 여기저기 물어본 결과, 안경은 편하지만 시력이 나빠질 가능성이 많고 드림렌즈는 귀찮지만 각막을 눌러서 초점을 보완해 주니 시력이 좋아질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일단은 안경보다는 드림렌즈 쪽으로 심란한 결정을 내렸다. 매일 렌즈를 끼고 빼는 건 엄마가 해줘야 한다고 하니, 그 과정의 불편함을 생각하고는 벌써부터 마음이 어수선하다. 육아가 거의 끝나간다 생각하는 마당에 다시 또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 이 기분, 너는 알까? 간단한 눈검사가 먼저 진행되었다. 현미경 같은 기계로 아이의 눈을 검사하신 검안사 선생님은, 일단은 정상으로 보인다는 소견을 말씀해 주셨다. 휴, 다행이다.
다음은 시력검사 차례다. 아이는 예상했던 대로 0.2-0.3부터 눈을 요상하게 뜨고는 글자나 그림이 헷갈린다, 잘 안 보인다를 남발했다. 검안사 선생님은 아이에게 렌즈를 뺐다 꼈다 할 수 있는 안경을 씌워주셨다. 렌즈는 총 4가지 정도가 있었다. 첫 번째 렌즈를 끼고 시력검사를 시작했다. 아이는 그제야 잘 보인다고 하며, 시력이 0.7-0.8까지 쭉쭉 올라갔다. 그리고는 같은 안경에 2,3,4번 렌즈를 이것저것 바꿔 끼시고 시력검사는 서너 차례 더 진행이 되었다. 어떤 렌즈를 바꿔껴도 시력은 0.7-0.8이었다. 그러다 마지막에 안경을 뺀 그냥 눈으로 다시 시력검사를 했는데, 또다시 0.2-0.3쯤 되자 안 보인다의 시작. 선생님께서 살짝 웃으시며 아이의 시력을 적어주셨다.
검사 후 시력은 0.7-0.8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보니, 선생님이 바꿔 씌워준 1-4번 안경렌즈에는 도수가 들어간 것, 안 들어간 것이 골고루 다 포함이 되어 있었다. 도수 없는 안경을 끼고도 잘만 보이게 되는 초능력이 잠깐 생겼던 걸까? 안경을 끼고부터 계속 잘 보인다고 느꼈던 건, 마치 임상시험에서 위약(가짜약)을 먹은 대조군이 약 효과를 느낀다는 플라시보 효과와 다름없는 것이었다. 아마 드림렌즈를 낀 아이들의 계열에 합류해서 드림렌즈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건지 성토대회를 하고 싶은 마음이 함께 작용했을 것이다. 설마 하고 넘겼던 내 짐작이 맞았다. 네 요놈!! 소리가 절로 나오려 했지만, 자기가 시력이 안 좋다는 걸 철석같이 믿고 싶어 하는 어린이의 마음에 생채기를 낼 수가 없었다.
"경민아, 안과 선생님이 너 시력검사한 거 말씀해 주셨는데, 생각보다 시력이 괜찮대. 안경이나 드림렌즈 안 껴도 된대."
"휴 다행이다.(실망한 눈치) 근데 왜 잘 안 보였던 거야?"
"지금 다시 한번 봐봐. 눈 검사하고 나니까 아까보다 잘 보이지?"
"응 그런 것 같기도 해."
시력 좋은 게 자랑이었던 초등 저학년을 지나고 고학년쯤 되자 아이들이 하나 둘 안경을 끼고 왔던 것 같다. 뿔테 안경을 낀 그 친구가 얼마나 예뻐 보였던가. 내 눈엔 반짝반짝 아이돌 같았다. 안경에 마음을 뺏긴 나는 친구가 끼는 안경을 '한 번만' 하고 껴보기도 하고, 엄마한테 안경을 사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시력이 나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눈을 세게 비비고 가서는 글자가 잘 안 보이는 척도 했다. 친구들이 하는 게 궁금하고, 나도 한번 해보고 싶은 그런 마음. 내 어릴 적을 생각하니 아직은 어린, 아이의 마음이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정기검진할 거 안과 와서 미리 검사를 해 본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경민아, 엄만 네가 최대한 늦게 천천히 드림렌즈를 끼면 좋겠어. 나이 들면 네가 원하든 원치 않든 노안이 찾아온단다.
플라시보 효과 (Placebo effect) : 의사가 효과 없는 가짜 약 혹은 꾸며낸 치료법을 환자에게 제안했는데, 환자의 긍정적인 믿음으로 인해 병세가 호전되는 현상이다. 심리적 요인에 의해 병세가 호전되는 현상으로 위약 효과, 가짜약 효과라고도 한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