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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락서 Jul 28. 2017

신이 되려 했는가

살인자의 기억법 - 김영하

신이 되려 했는가


  ‘이카로스’라고 들어보셨나요? 이카로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로 이카로스의 아버지는 ‘다이달로스’입니다. 다이달로스는 뛰어난 건축가로 크레타에서 부탁을 받아 ‘미노타우르스(머리는 황소, 몸은 사람)’를 가두기 위한 미로 ‘라비린토스’를 만들었죠. 하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자신의 아들 이카로스와 되레 라비린토스에 갇히게 됩니다. 다이달로스는 밀랍으로 깃털을 엮어 탈출을 계획합니다. 그리고 탈출하면서 아들에게 말하죠. 너무 높게 날면 태양의 열기에 밀랍이 녹고, 너무 낮게 날면 바다의 습기에 깃털이 무거워지니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게 날아야 한다고 말이죠. 문제는 대부분의 이야기가 그렇듯 꼭 하지 말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아서 일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자유로이 하늘을 날던 이카로스가 아버지의 충고를 잊고 하늘 높이 날다가 태양열에 밀랍이 녹아 추락합니다. 이카로스는 신이 되고 싶었던 걸까요?



노인, 치매, 시인, 살인자


  김영하 작가의 『살인자의 기억법』을 읽었습니다. 화자 김병수는 70대의 노인입니다. 딸 하나를 슬하에 두고 사는 그는 시인이고, 최근 알츠하이머에 걸려 기억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과거 수십 명을 죽였던 연쇄 살인범입니다. 노인, 치매, 시인, 살인자. 어쩐지 생경한 조합이지요. 그런데 왜 난데없이 앞에서 이카로스 이야기를 꺼냈을까요? 김영하의 또 다른 유명작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이 시대에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에게는 단 두 가지의 길이 있을 뿐이다. 창작을 하거나 아니면 살인을 하는 길.


  여기서 ‘신(神)’을 종교의 대상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인간을 뛰어넘은 존재정도로 인식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창작과 살인이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길일까요? 조금 더 생각을 해보자면 창작은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일입니다. 마치 신이 세상을 만든 것처럼 말이지요. 그리고 인간은 모두 내면에 하나의 세계를 갖고 있죠. 그러니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인간을 죽이는 일은 한 세계를 소멸시키는 일입니다. 세계의 창조와 소멸은 신의 영역이기에 창작과 살인이 신이 되려는 인간의 길인 거 아닐까요?


  그런데 『살인자의 기억법』의 화자 김병수는 창작도 하고 살인도 합니다. 신에게 이르는 두 가지 길을 모두 한 셈이죠. 수십 명을 죽인 살인자를 여전히 인간의 범주에 포함시켜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겠습니다. 하지만 어떤 죄책감도 후회도 없이 수십 명을 살해하고 여전히 발 뻗고 여생을 보내는 화자는 분명 인간의 틀을 벗어난 존재 같기도 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어떤 존경도 없습니다. 그저 무언가 다른 존재 같다는 감각만을 말하는 것입니다. 화자는 생각합니다.


  나는 악마인가, 아니면 초인인가, 혹은 그 둘 다인가. 


  창작과 살인. 신에게 이르는 길 두 가지 모두 행하는 화자. 그는 신일까요? 그렇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인간을 벗어난 초인적인 면모를 보이면서도 여전히 일면에서는 인간적이기도 하니까요. 가까운 기억부터 차차 사라지는 병, 치매. 화자는 죽음 앞에서 갈팡질팡 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죽음은 두렵지 않다. 망각도 막을 수 없다. 모든 것을 잊어버린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닐 것이다. 지금의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내세가 있다 한들 그게 어떻게 나일 수 있으랴.


  하지만 이런 생각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는 다시 고백합니다.


  두렵다. 솔직히 좀 두렵다.
  경을 읽자.



신의 장난인가, 심판인가


  화자가 처음 죽였던 대상은 아버지였습니다. 매일같이 가정폭력을 일삼는 화자의 아버지였습니다. 열여섯 살이 된 화자는 아버지를 베개로 눌러 죽입니다.


  아버지가 나의 창세기다. 술만 마시면 어머니와 영숙이를 두들겨 패는 아버지를 내가 베개로 눌러 죽였다. 그러는 동안 어머니는 아버지의 몸을, 영숙이는 다리를 누르고 있었다. 영숙이 나이 고작 열 셋이었다. 옆구리가 터진 베개에서 왕겨가 쏟아져나왔다. 영숙이는 그걸 쓸어담고 엄마는 멍한 얼굴로 베개를 꿰맸다.


  창세(創世). 열여섯, 김병수는 살인을 하고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죽었던 나이 45세까지 살인을 계속했죠. 인간을 벗어나 두려울 것 없는 초인이 되어 신으로 가는 길을 걷던 그가 다다른 곳은 치매입니다. 살인자에게 치매라니. 신의 장난일까요, 아니면 심판일까요.


  분명히 뭔가를 하러 방에 들어왔는데 그 뭔가가 뭔지 전혀 생각나지 않아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를 조종하던 신이 조종간을 놓아버린 것 같다.


  점차 현실이 환상이 뒤섞이기 시작합니다. 생전 모르는 개를 딸 은희는 우리 개라고 말합니다. 또 언젠가는 개가 없다고 말합니다. 국수를 먹었는데 개수대에 먹다 남긴 국수가 그릇째로 들어있습니다. 처음 보는 경찰이 자신을 알아봅니다.


  모든 것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글로 적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보면 아무것도 안 적혀 있다. 녹음했다고 생각한 말이 글로 적혀 있다. 그 반대도 있다. 기억과 기록, 망상이 구별이 잘 안 된다.


  모든 것에 의문이 생깁니다. 과연 그가 기억하는 것이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망상일까요? 그는 살인을 하긴 했던 것일까요? 그의 딸 은희, 그가 살인범이라고 의심하는 박주태, 안 형사 등. 모두 다 존재하긴 하는 것일까요? 치매이지만 분명히 기억하는데 어떻게 현실이 아닐 수가 있을까요?


  김병수는 한 번도 구금되거나 잡힌 적이 없었습니다. 시대가 그런 시대였죠. 책임 있고 치밀한 수사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으레 간첩이겠거니 하고 넘어가던 때였습니다. 그런 화자도 상상하던 감옥이 있습니다.


내 악마적 자아의 자율성을 제로로 수렴시키는 세계, 내게는 그곳이 감옥이고 징벌방이었다. 내가 아무나 죽여 파묻을 수 없는 곳, 감히 그런 상상조차 하지 못할 곳, 내 육체와 정신이 철저하게 파괴될 곳. 내 자아를 영원히 상실하게 될 곳.



상, 벌, 혹은 공(空)


  언제나 ‘적절치 못한 곳’에서 헤매는 치매 노인, 김병수. 그는 천천히 그러나 끝없이 기억을 잃고 존재를 잃어갑니다.


  무심코 외우던 반야심경의 구절이 이제 와 닿는다. 침대 위에서 내내 읊조린다.
  “그러므로 공空 가운데에는 물질도 없고 느낌과 생각과 의지작용과 의식도 없으며,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도 없으며, 형체와 소리, 냄새와 맛과 감촉과 의식의 대상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없고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으며,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늙고 죽음이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없어짐과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으니라.”


  작가 그리고 살인자 김병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아니, 무엇이 되는 것일까요. 이카로스처럼 너무 높이 하늘을 날았던 것일까요? 신에게 이르는 길 모두를 행한 벌로 공(空)으로 추락하게 된 것일까요? 아니면 정말 인간을 벗어나 초월적인 세계로 나아가게 된 것일까요?


  김병수가 죽였던 모든 것, 싸웠던 대상, 지키고자 했던 것, 기억하고자 기록했던 것. 모든 것은 결국 공(空)으로 수렴합니다. 애초에 그는 존재하기는 했던 것일까요? 망각과 존재의 소멸,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 이 짧은 이야기는 결코 가벼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무겁기만 한 이야기도 아니죠. 읽기에 따라 한 없이 가벼운 농담 같기도 하고, 소름끼치게 무서운 이야기가 되기도 합니다. 실없는 농담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사람을 죽이고, 피가 분출되는 무서운 이야기를 말하는 것도 아니죠.


있을 법하면서도 상상의 세계에 속할 것 같은 이야기. 김영하의 작품을 읽으면 현실인 듯 아닌 듯 모호한 경계를 걷고 있는 나를 발견합니다. 그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도 그랬고, 단편 『흡혈귀』도 그랬습니다. 물이 스미듯 그의 작품에 빠져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김영하가 다음에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 궁금해집니다. 신, 살인, 창작, 공(空).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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