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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락서 Aug 06. 2017

그러니까, 친애하는 여러분

디어 랄프 로렌 - 손보미

https://youtu.be/Lghmro9uVVs

길, 그리고 단절.


  달린다. 달림과 달리는 길에 의문 따위는 없다. 눈앞에 주어진 길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달린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불러 세운다. 그리고 ‘이 길’이 아니라고 말한다. 내가 달려야 할 길은 이 길이 아니라고. 그 말에 나는 멈춰 선다. 뒤돌아보니 출발점은 이미 까마득히 멀어져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할까? 멈출까? 아니, 그냥 계속 달릴까? 그런데 이 길이 아니라는데?


  당황. 이런 순간을 표현하자면 당황이라는 말이 잘 어울릴까요? 사실 당황이라는 말로 표현될 정도의 일이라면 다행이지요. 만약 그 사안이 아주 중대하다면? 자신의 삶 전체가 부정당하는 정도의 일이라면? 분명 당황이라는 말로 끝나지 않겠죠. 분노, 혹은 좌절, 절망. 그 어떤 격하고 무거운 감정을 덧대보아도 모자랄지도 모릅니다.


  손보미의 『디어 랄프 로렌』 주인공 ‘종수’에게 바로 그런 순간이 찾아옵니다. 외국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종수는 어느 날 ‘기쿠 박사’로부터 갑작스러운 단절을 통보받습니다. 아무래도 다른 길을 찾아보는 게 좋겠다는 말이었지요. 기쿠 박사가 제아무리 조심스럽고 신중을 기하고 말하였다고 하더라도 종수에게는 여태까지 달려온 자신의 경력의 단절을 의미하는 말이었죠. 갑작스레 달리던 길이 끊기는 상황. 좀처럼 현실이라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그런 순간. 종수는 자신이 달리던 길 위에 우두커니 멈춰 서야만 했습니다.


  “종수, 인생은 길어, 정말이지 길어.”
  나는 그게 개소리라고 생각했다.


  가혹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이런 상황을 빠르게 수긍하고 극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대부분의 사람은 무풍지대에 떠 있는 돛단배처럼 목적과 동력을 잃고 표류할 것입니다. 종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도 어찌해야 할지 모른 채 홀로 표류하죠. 그러던 종수가 잠긴 서랍장에서 발견한 것은 뜻밖의 물건입니다. 수영의 편지.


  “디어 종수, 나는 아주 잘 지내. 곧 결혼식을 올릴 거야. 나는 무척 행복해. 너도 잘 지내길 바란다.”


  머릿속에 물음표만 떠오르던 종수는 기억의 서랍장을 뒤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깨닫죠. 고등학교 시절 수영과 랄프 로렌. 아니, 도대체 어떻게 그 일을 잊을 수가 있지?



수영과 랄프 로렌


  고등학교 시절. 수영은 갑작스레 종수에게 찾아와 부탁합니다. ‘랄프 로렌에게 보낼 편지를 영작해주는 것.’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수영은 방금보다는 자신감이 떨어진 목소리로 다시 한번 더 말했다.
  “너에겐 정말 식은 죽 먹기일 거야.”
  그리고 덧붙였다.
  “난 정말이지 최선을 다하고 싶어.”


  전에는 말 한번 나눠본 적 없던 수영의 부탁이었죠. 그런데 그 부탁이라는 것 역시 종수가 보기엔 허무맹랑하기 그지없습니다. 랄프 로렌에게 편지를 쓰다니요.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시계, 시계가 필요해. 시계. 그게 있어야 해. 손목시계. 그래야 정말 머리부터 발끝까지 랄프 로렌으로 걸칠 수 있는 거란 말이야. 랄프 로렌은 시계를 만들지 않아. 손목시계 말이야. 그걸 생각하면 우울해져.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리는 것 같아.”


  요컨대 수영은 랄프 로렌 컬렉션을 완성하고 싶은 거였습니다. 그런데 랄프 로렌에서는 시계를 만들지 않았고, 수영은 시계를 만들어달라는 편지를 보내고 싶었던 거죠. 어처구니없는 부탁.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생각하면서도 종수는 수영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합니다.



종수와 랄프 로렌


  다시 한 번. 아니, 도대체 어떻게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을 수 있지? 그때부터 종수는 랄프 로렌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합니다. 랄프 로렌과 관련된 기사를 읽고, 그와 관련된 사람들을 조사하고, 인터뷰를 하죠. 하지만 대학원에서 쫓겨난 종수에게 갑자기 랄프 로렌을 찾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손에 쥔 것을 잃어버리고 공허를 참을 수 없어 자신을 달래듯 종수는 랄프 로렌을 조사하는 일에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겪고 있는 문제들로부터 나 자신을 떨어뜨려놓으려고 했었던 것 같다. 내게 닥친 문제들에 너무 무심하지도, 혹은 너무 애쓰지도 않을 수 있다고, 그러니까 마치 공중에 걸린 줄 한가운데에 언제까지고 균형을 잡으며 서 있을 수 있다고, 그런 착각 속에 영원히 머물기를 바라면서.


  대학원에서 그랬듯 종수는 랄프 로렌을 연구합니다. 이해하기 힘들 정도의 노력을 들이면서 말이죠. 수영과 랄프 로렌에게 편지를 쓰던 일은 아주 오래전 일이고, 실제로 기억 속에서도 까마득히 잊힌 일이었는데 말이죠. 이제 와서 랄프 로렌을 조사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훗날 병상에 누운 이모가 말했던 것처럼 종수는 그저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것이었을까요? 일단 호랑이 등에 올라타면 멈출 수가 없듯이 말이죠.



랄프 로렌, 헨리 카터, 조셉 프랭클, 레이첼 잭슨 여사, 섀넌 헤이스


  종수는 자신을 작가라고 속이며 랄프 로렌에 대해 조사합니다. 랄프 로렌과 인연이 있는 인물을 찾아 인터뷰를 하죠. 그 과정에서 종수는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역시 예상치 못한 사실을 알게 되기도 하고, 알던 것과 다른 사실을 만나서 당황하기도 하죠.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조사는 매번 벽에 부딪히지만 우연히 발견한 조그만 틈새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는 합니다.


  랄프 로렌을 조사하는 종수지만 그의 이야기에는 랄프 로렌만 있지 않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부터 관련된 들어본 적 없는 사람의 이야기도 등장하고, 종수 자신의 이야기도 섞이고, 랄프 로렌과 관련 없어 보이는 섀넌의 이야기, ‘코끼리 뚱뚱보’ 에머슨 씨의 이야기도 버무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 모든 이야기가 무슨 의미가 있다고?



타인의 삶, 기억, 기록, 그리고 나의 이야기


  종수가 조사했던 것들, 녹음했던 이야기를 살펴본다 한들 숨겨진 비밀을 파헤치는 쾌감 같은 것은 없습니다. 반전의 전율을 느끼게 하는 아슬아슬한 이야기도 없습니다. 그냥 조금씩 연관이 되어있는 듯 하면서도 전혀 상관없는 각자의 이야기들입니다. 종수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쓰레깃더미에서 ‘가치’가 있는 것을 귀신같이 찾아낼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사람은 아니다. 이건 아무리 잘되어봤자, 기껏해야 재활용품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아니, 재활용품이라도 될 수 있다면 감지덕지일 것이다. 이 책 역시 여전히 많은 단절과 머뭇거림과 생략이 있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만족하기로 한다.


  다만 종수는 이 모든 과정에서 다양한 삶을 그대로 ‘보고’, ‘듣고’, 그리고 자신의 삶도 ‘기억’하게 되죠. 그가 오해했던 기억 속의 사람들. 자신을 내쫓았던 기쿠 박사. 랄프 로렌의 편지를 부탁했던 수영. 방문을 똑똑 두드리던 지아 류.


그는 그 순간, ‘기쿠’ 박사도 아니고, ‘미츠오’도 아니고, ‘늙은 여우’는 더더군다나 아니었다. 그는 그저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이었다. 바로 이 과정을 통해 그는 다시 자신의 연구실로 돌아갈 동력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그제야 나는 깨닫게 된 것이다.


삶이 축제는 아닐지언정, 그게 자신을 지치게 하더라도, 계속 끌고 나가야 한다고 다짐하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잭슨 여사는 자신의 삶을 할 수 있는 한 ‘오랫동안’ ‘움직이게’ 만들었다.


지아 류 말이에요. 있잖아요, 그 친구는 내가 학교에 안 나간 후부터 내 집 문을 두드렸어요. 노크 말이에요. 누군가 내 집 문을 노크해줬죠. 섀넌, 나는 그걸 계속 비웃었지만, 이제는 비웃는 걸 그만해야 할까봐요. 섀넌, 이 세상의 누군가는 당신의 문을 두드리고 있을 거예요. 그냥 잘 들으려고 노력만 하면 돼요. 그냥 당신은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돼요.”


하지만 그날 섀넌과 밤을 보내면서, 나는 어렴풋이나마 그 답―왜 나는 수영이 보낸 청첩장을 서랍 속에 넣고 잠가버렸을까, 에 대한―을 알 것 같았다. 아마도, 나는 그렇게 하면 거기서 영원히 도망갈 수 있으리라고, 어떤 식으로든 한 번도 붙잡히지 않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으리라.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지만 뭔가가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게 무엇일까?


  종수의 랄프 로렌에 대한 조사는 언제까지 계속될 수는 없습니다. 그 모든 일은 단지 갑작스런 단절로 인한 삶의 공백기를 채우는 정도의 일이었죠. 그러니 그 틈새를 채우고 나면 끝이 날 그런 일이었습니다. 종수도 이를 잘 알고 있습니다.


전 정말로 위기에 처해 있었어요. 지난 십 년간의 내 삶이 그저 거짓의 연속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아버렸거든요. 과거가 나를 공격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나는 벗어나려고 애쓰고 있었어요. 그런 적 없으세요? 도망치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 때 말이에요. 하지만 누구도 그런 식으로 영원히 도망다닐 수 없죠. 언젠가는 그 사실과 직면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조금만 뒤로 미룰 수도 있잖아요. 비겁하다고 해도 그게 한 가지 방식이 될 수는 있잖아요.


  그래요. 언젠가 자신의 삶에 주어진 가혹한 사실에 직면해야 하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죠. 영원히 도망칠 수는 없으니까요. 다만 조금 뒤로 미루고 싶었던 종수였습니다.


  나는 그렇게 거기에 서서 아주 오랫동안 죽은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 정말로 내가 ‘어디론가’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모든 방황이 끝나고 종수는 원점으로 회귀합니다. 달라진 것은 없죠. 대학원에서 쫓겨났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랄프 로렌을 조사하며 새로운 진로를 찾은 것도 아니었고요. 하지만 지아 류가 방문을 두드렸을 때 느꼈듯, 달라진 것은 없지만 무언가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게 뭔지는 모릅니다. 다만 ‘어디론가’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알게 되었죠.



디어 랄프 로렌 Dear Ralph Lauren


“디어, 는 다정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만 쓸 수 있는 말인 것처럼 느껴져. 아주 친밀하고 따뜻해.”


  좀 더 나은 랄프 로렌에게 보내는 편지를 위해 항상 양보하던 수영도 절대 포기하지 않던 부분이 있습니다. 편지의 첫 문장, 디어 랄프 로렌. 종수는 너무 식상한 표현이라고 반대했지만, 수영은 고집합니다. 결국 그 문장은 수영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죠.


그녀의 편지는 완성되었을까? 잘 모르겠다. 정말로 잘 모르겠다. 나는 짐작도 하지 못하겠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편지가 완성되었든 그렇지 않았든, 그 편지의 가장 첫 문장은 온전히 수영의 문장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문장은 이 세상 그 어떤 문장보다도 진실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디어 랄프 로렌.


  기록의 마지막에서 종수가 깨달은 것은 바로 이거였죠. ‘디어 랄프 로렌’ 온전한 수영의 문장. 세상 그 어떤 문장보다도 진실된 문장.


  잘 달리던 삶의 길이 갑자기 끊어지고, 길을 잃었던 종수. 가혹한 현실을 마주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종수. 그 모든 무의미해 보이는 조사 끝에 제자리로 돌아온 종수. 모든 게 그대로인 상황. 하지만 종수는 걷기 시작하겠죠. 삶의 틈새를 뛰어넘어 새로운 길을 찾겠죠. 어떤 길일지는 모르겠으나 온전한 자신의 문장, 자신의 길을 만들며 나아가게 될까요?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요. 그러니까,

  디어 종수.

  그리고 친애하는 여러분.




에필로그: 종수와 콜필드


  손보미의 『디어 랄프 로렌』을 읽고 시간을 들여 생각해보다 문득 떠오르는 작품이 있습니다. 바로 J. D. 샐린져의 『호밀밭의 파수꾼』이었습니다. 갑작스런 삶의 단절, 그리고 방황. 물론 세세히 보면 분명 다른 작품이지만 그래도 덕분에 『디어 랄프 로렌』이 더욱 친숙하게 느껴졌네요. 다른 시대, 다른 문화에서 각각 방황하던 콜필드와 종수. 아직 읽어보지 못하신 분이라면 두 작품을 같이 읽어보는 것도 재미있는 경험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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