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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락서 Jan 04. 2018

사춘기 소녀의 상상력이 만든 비극

『속죄』 - 이언 매큐언

  장편을 읽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일단은 책의 두께가 현실적으로 무겁죠. 전자책의 발달이 이러한 문제를 경감시켜주고 있다고 해도 책장을 넘기는 기쁨을 즐기는 이들에게는 전자책이 완전한 대체품이 될 수 없으니까요. 또한, 장편의 두터움은 단순히 들고 다니기 힘들다는 사실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읽기 힘들기도 하지요. 읽는 시간이 물리적으로 오래 걸리고, 온전히 책만 읽고 지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재개와 중단을 오가며 노력해야 하죠. 그럼에도 그러한 노력을 하는 이유는 굳이 어렵게 말하지 않아도 자명합니다. 재미있으니까!
  
  오늘 떠들어 볼 작품 역시 장편입니다. 만만치 않은 무게의 500쪽이 넘는 책이죠. 하지만 점점 손에서 놓기 힘들 정도로 흡입력이 뛰어나고, 서사는 예상을 뛰어넘습니다. 너무 진부한 표현이지만, 확실히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바로 ‘이언 매큐언 Ian McEwan'의 『속죄 Atonement』입니다.
  줄거리를 장황하게 떠들지는 않겠습니다. 흥미로운 서사를 읽는 즐거움을 빼앗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다만 읽을 때 조금 더 눈여겨보면 재미를 더해줄 몇 가지 부분을 살펴보려 합니다.


  『속죄』는 총 네 파트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주된 서사가 되는 1, 2, 3부와 에필로그 형식의 ‘1999년 런던’이 있죠. 그중 1부는 ‘브리오니’가 화자로 등장합니다. 이 사춘기의 어린 소녀는 상상력이 매우 풍부하죠. 시시각각 변하는 브리오니의 생각과 소녀의 상상력으로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1부의 큰 줄기입니다. 
  
의식의 흐름 Stream of consciousness
  
  ‘의식의 흐름 기법’ 어쩐지 국어 시간에 많이 들어봤던 말 아닌가요? 인간의 시시각각 변하는 의식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서술하는 기법이지요. 상상력이 풍부한 사춘기 소녀의 급변하는 생각은 다소 뜬금없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욱 생생하게 전달이 되기도 합니다. 몇 장면을 꼽아보자면 브리오니가 자신의 손가락을 보며 생각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한 손을 들어 다섯 손가락을 다 굽혀보면서 이것이, 사물을 쥐는 용도로 쓰이는 이 기계가, 팔 끝에 달린 이 살 붙은 거미다리 같은 것이 어떻게 전적으로 그녀의 명령을 받아 움직이는 그녀만의 소유물이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예전에도 몇 번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다. 이 손가락들에도 나름의 생명이 있는 것일까? 손가락 하나를 굽혔다가 다시 펴보았다. 비밀은 손가락이 움직이기 직전의 순간에, 움직임이 없다가 그녀의 의도가 효력을 발휘하여 움직임이 나타나는 바로 그 순간에 있었다. 그것은 마치 부서지는 파도와 같았다.

  상상해보세요. 소녀가 방 안에서 홀로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 겉으로 보기에 어떤 일도 없고, 아무것도 아닐 그 순간에 소녀의 의식은 파도와 같이 흐르고 있는 것이죠. 이 부분에서 ‘버지니아 울프 Virginia Woolf'의 작품이 떠오릅니다. 울프 역시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유명했고, 실제로 그녀 작품 중에 『파도 The Waves』라는 작품이 있기도 하고요. 
  사실 이러한 연상은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3부에 나오는 브리오니의 생각을 보시죠.

지금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생각과 인식 그리고 마음이었다. 끊임없이 흘러가는 강물과 같은 의식의 흐름, 그 강물의 흐름과 갑자기 한데 모여 잔잔한 강에 동요를 일으키는 지류, 그리고 강물의 방향을 바꾸게 될 예기치 않은 장애들. 이런 것들을 어떻게 잘 표현하는가가 그녀의 유일한 관심사이자 바람이었다. 여름날 아침의 청명한 햇살을 글로 살려낼 수만 있다면, 창가에 서 있는 아이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해낼 수만 있다면, 물 위를 나는 제비의 유연한 움직임과 갑작스레 물에 뛰어들어 목을 축이는 동작을 생생하게 그려낼 수만 있다면. 앞으로 나올 소설은 과거의 그 어떤 것과도 같지 않을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파도』를 세 번이나 읽은 그녀는 인간 본성에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했고, 새로운 종류의 소설만이 그 변화의 본질을 잡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브리오니의 의식이 그녀의 상상력에 힘입어 흐르는 장면을 하나 더 꼽아보자면, 브리오니가 애먼 쐐기풀을 막대기로 치는 장면도 있습니다.

  쐐기풀을 쳐내는 데 몰두하던 브리오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쐐기풀 쳐내기 종목의 최우수 선수인 그녀를 다룬 특집 신문기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내년 베를린 올림픽에 국가대표로 출전하여 금메달을 딸 것이 확실시되는 브리오니 탈리스를 능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기술을 갖추었고 특히 맨발을 선호했다.

  참으로 터무니없는 상상이지요. 그녀의 상상은 곧이어 들리는 마차 소리에 연기처럼 사라집니다. 이런 순간적으로 피어오르는 상상들. 그리고 갑작스런 소리 하나에 깨어져버리고 마는 상상들. 
  이렇게 『속죄』의 1부를 감상하실 때 각 인물들의 의식의 흐름에 집중해 보신다면 그들의 성격과 이후 생기는 미묘한 갈등에 더 가까이 다가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이나모 작전 Operation Dynamo
  
  『속죄』는 2부와 3부를 거치면서 빠르게 사건이 전개됩니다. 시간도 훅훅 지나가고 지루할 틈 없이 이야기는 나아가죠. 2부와 3부를 조금 더 재미있게 읽는 방법이라면 당시의 역사를 조금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난데없는 역사라니. 다소 딱딱하게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2부와 3부는 인류 역사의 특별한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참혹한 시기, 제 2차 세계 대전입니다. 제 2차 세계대전에 대해 세세히 알아야 『속죄』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최소한 2부의 로비가 겪는 이야기 ‘다이나모 작전’에 대해서 알면 좋겠죠. 생소한 이름인가요? 이를 다룬 영화도 있습니다. 바로 ‘크리스토퍼 놀란 Christopher Nolan' 감독의 〈덩케르크 Dunkirk〉입니다. 
  기적과도 같은 대탈출. 이 탈출에 대하여 인터넷을 찾아보는 것도 좋습니다. 혹은 아예 바로 위에 언급한 영화를 보는 것도 좋겠죠. 그러면 작중 인물이 처한 상황이 마음에 더욱 와 닿을 거라 확신합니다. 알면 더 많이 보이고, 더 재미있다는 말이 이런 것을 말하는 거겠죠. 


단절과 연결의 서사
  
  오늘 소개할 『속죄』를 재미있게 읽는 마지막 방법은 사실 모든 문학 작품을 읽을 때 적용되는 방법이겠습니다.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설정의 상징성을 유추해 보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볼까요? 브리오니와 사촌들이 그녀의 창작극 〈아라벨라의 시련〉을 연습하는 장소가 원래 ‘유아실’이라는 점은 상징적인 부분이겠죠. 실제로 브리오니의 그 유아기적인 상상력 때문에 모든 일이 그릇되고 마니까요.
  혹은 『속죄』를 연결과 단절의 싸움이라고 읽을 수도 있겠습니다. 작품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되거나 부정적인 일이 발생하게 되는 배경을 보면 대부분 단절의 이미지에 근접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이혼, 사건이 일어나던 그날 밤의 어둠, 갑작스런 극의 중지와 포스터를 찢는 행위, 도자기가 깨지는 것 등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작품 내에 연결의 이미지는 무엇이 있을까요? 조부모가 걸어놓은 초상화, 에필로그, 세실리아와 로비의 관계 등. 이 싸움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작품을 읽으며 자신이 생각하는 틀로 작품을 관망해보는 것. 분명 문학을 즐기는 기본적인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어디가 맞고, 어디가 설명되지 않는지. 그렇다면 가정을 어떻게 바꾸어보면 될지. 그 과정 속에서 새로운 『속죄』의 재미가 창조되는 것이겠지요.
  
속죄 Atonement
  
  모르고 보아도 재미있고, 알면 더욱 재미있는 ‘이언 매큐언’의 『속죄』. 추가적으로 『속죄』는 영화화 되기도 하였습니다. 〈어톤먼트 Atonement〉라는 이름으로 말이죠. 역시 함께 즐기면 더욱 재미있겠네요.

  『속죄』는 장편입니다. 삶이 바빠 책 읽기에는 시간이 빠듯한 현대인들에게 소화하기 힘든 분량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예상 외로 순식간에 읽어 내려가실 수도 있어요. 그러니 『속죄』가 던져주는 갖가지 질문들을 함께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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