낱장 일기00
쓸만한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하지 말자. 어차피 이곳에 적히는 글은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함이라기보다는 내 최소한의 만족 혹은 자기기만을 위한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크니까. 대부분의 글이 발밑에 바스러지는 나뭇잎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에 불과할 테니. 그러나 제 수명을 다하고 떨어지는 낙엽에도 그 나름의 역할이 있고, 그 유명한 시몬아 너는 들리느냐 낙엽 밟는 소리가 같은 말도 탄생시켰으니 뭐 어쩌면 일말의 아주 조금이라도, 마치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졸라 산 씨몽키처럼, 그 나름의 버둥거림에 약간의 의미를 담을 수도 있겠다. 나는 본디 긍정적인 인간이 아닌 터라 아마 높을 확률로 이곳에 적힐 글 역시 까슬한 냉소와 비릿한 슬픔, 통렬한 회한 따위로 가득 찰 것이다. 물론 말은 이렇게 하였지만, 그게 아름답거나 보기 좋은 형태로 나타나진 않을 것이다. 그런 걸 바라기엔 읽은 책이 너무 많다. 아무튼 그럴듯한 느낌으로 적어본 상기 감정들은 지금 내가 글을 쓰는 이 시간에 눈을 뜨고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20년 지기 친구보다도 더 친근하고 중고나라에서 선입금을 받고 잠수를 타버리는 사기꾼보다도 더 증오스러울 것이다. 만약 당신이 그렇다면, 반갑다. 나와 동류로 적어도 혼자는 아니라는 말이니. 그런데 여기서 또 당신이라는 말을 쓰는 거 보면 글의 초반부에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고 말했던 걸 벌써 계란후라이 뒤집듯 쉬이 엎어버리는 걸 볼 수 있다. 그래, 솔직해지자.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기 위해 쓰는 글이라는 건 솔직히 존재하지 않는다. 그럴 거면 애당초 쓰지도 않는 게 가장 자명한 논리인데 그럼에도 쓴다는 것은 어떤 방식이든 누군가 알아줬으면 하는 것을 의미한다. 뿌연 수증기가 가득 찬 사우나에 들어간 듯 온몸을 답답하게 만드는 보편적이지만 어두운 감정들. 누구나 터지기 전의 맹장처럼 정신을 곪게 만드는 것들을 가지고 있다. 그런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인간이라면, 부럽기는 하다만, 과연 그걸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싶다. 걱정과 고민이 없는 존재는 인간보다는 격하하자면 인형에 더 어울리고 격상하자면 초월자에 어울리지 않을까? 구태여 신이라는 말을 안 쓰고 초월자라 한 것은 신이라는 단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영향으로 인격신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에. 인격신이라면 걱정과 고민이 없다는 것도 말이 안 되잖은가.
사실 나는 궁금하다. 이렇게 삶에 대한 불만 혹은 좌절을 헛소리의 형태로 풀어내는 와중에 나와 같은 동류인 당신은 어떻게 그 검붉은 감정을 풀어내고 있는가? 당신 역시 글로 지금 내가 하는 것처럼 어느 날 문득 문서를 켜서 적당한 광기를 연료 삼아 조용한 방을 투닥거리는 타자 소리로 채우고 있는가? 아니면 아예 다르게? 고리타분한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어떤 방법으로? 그러나 좋다. 그 어떤 12차원적인 나의 이해를 벗어난 방법이든 당신이 타르처럼 찐득한 그 감정을 풀어내고 있다면 일단 축하한다. 이건 마치 환자에게 병에 걸려 축하한다고 말하는 꼴 같기도 하지만, 본인이 환자임을 아는 것이 치료의 첫 번째이니 당신이 현재를 벗어나 미래를 향한 미세한 발돋움을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미래지향적 긍정적 축하이다. 아 물론 이건 분명 일정 부분 나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처음에는 이 글을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끝맺을지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글만 읽어보아도 너무나 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기본적으로 무계획을 상정한다는 것을. 한 페이지가 끝을 보이는 마당에 어쩌면 그것이 42.195km의 결승선처럼 적절한 신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솔직히 42.195km 같은 거창함보다는 원룸 침대에서 화장실까지의 한 3m 거리 정도가 비유에 더 적당함을 인정한다.
시간이 다 되었다. 새벽 5시가 되어가는 물리적인 시간도 그렇고, 더 이상 무언가를 끄집어낼 수 없는 정신적 시간도 임계점에 다다랐다. 시작이 그러했던 것처럼 사라져야겠다. 좋은 새벽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