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락서 Nov 12. 2020

어제 그녀가 떠났다.

어제 그녀가 떠났다. 그녀가 곧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내게 남기고 약 일주일이 흐른 때였다. 반년 만에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을 때, 나는 의외의 감정을 느꼈다. 그녀 쪽에서 내게 연락할 일이 좀처럼 없었기에 핸드폰에 뜬 그녀의 이름을 보며 혹시 결혼이라도 하려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언제 하려나, 상대는 저번에 말했던 그 남자친구인가, 축의금은 얼마나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이 중구난방으로 머리를 스쳤고, 나는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전혀 놀라지 않은 말투로 전화를 받았다. 내 예상과는 다르게 통화는 지극히 상투적이었다. 어떻게 지내냐고 묻고, 별 일은 없냐며 되묻고, 요즘 날이 추워졌다는 뭐 그렇고 그런 대화. 이제 본격적으로 용건이 나오려나 싶은 찰나 그녀가 말했다. 할 말이 있으니 내일 학교 근처 오성에서 보자고. 나는 별 말없이 동의했다.

카페에 먼저 나와 그녀를 기다렸다. 약속 시간이 살짝 지나서 그녀가 도착했다. 긴 머리에 베이지 니트와 갈색 슬랙스, 검은색 모직 코트를 걸치고 굽 없는 검은 구두를 신고. 조금 늦었다며 미안하다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커피를 몇 번 홀짝이고, 가벼운 침묵이 찾아오자 그제야 그녀는 말을 꺼냈다. 곧 떠나게 될 것 같다고. 원체 똑똑한 그녀였기에 해외로 가는구나 싶었다. 그게 아주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미국일지 유럽일지 궁금해하며 어디라고 되물은 나의 질문에 그녀가 대답을 망설이기 전까지는. 그녀는 시선을 모로 돌리며 입술을 다물었고, 나는 재촉하지 않고 커피잔을 들 뿐이었다. 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대답이 나왔을 때, 나는 그것이 농담이거나 수사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꿈이라고 말했던 것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단어의 의미를 몰라서가 아니라, 그 단어가 그때의 상황에 적절한 것인지 판단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는 그녀는 말을 에둘러 표현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므로.

그녀는 요즘 꿈을 자주 꾼다고 했다. 모든 꿈이 대게 그렇듯 아주 현실적인 꿈을 꾼다고 했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꿈이 서로 이어진다고도 말했다. 저번 꿈과 이번 꿈이 현실 세계처럼 연결성을 갖는다고. 그게 벌써 반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나는 적절한 리액션을 찾지 못한 패널처럼 그녀의 꿈 이야기에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마치 흥미로운 소설 한 편을 듣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말을 잠시 멈추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그녀의 꿈에 대해 한 마디를 덧붙였다. 점차 꿈이 길어지고 있어.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마지막 꿈은 3개월 동안 지속되었다고 했다. 일어나 보니 계절이 바뀌어 있었고, 바닥엔 먼지가 버석하게 쌓여있었고, 몹시 배가 고팠다고 했다. 급하게 밥을 먹고, 지난 잠으로부터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구체적으로 알게 되자 불현듯 어떤 예감이 들어 나에게 연락한 것이라 했다. 그녀는 확신했다. 이번에 다시 잠들면 꽤 오랜 시간이 흐를 것임을. 이번엔 계절이 아니라 해가 그것도 몇 해가 흐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그녀는 어제 일어난 후로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고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내게 몇 가지를 당부할 때에도 나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한 달에 한 번씩 가능하면 자신의 집에 들러 무슨 일이 없는지 봐달라고 했다. 바닥의 먼지만 조금 쓸어주고, 짧게나마 환기도 시켜달라고. 대부분의 비용은 자신의 통장에서 자동으로 빠져나가나 그녀의 잠이 일 년을 넘어가면, 그녀의 부모에게 연락하여 설명을 부탁한다고. 자신이 잠든 동안 들어간 비용은, 이 부분을 말하며 그녀는 웃었다, 일어나서 정산해주겠다고 했다.

그녀는 그로부터 일주일을 버텼지만, 결국 잠들었다. 그녀가 말해준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간 그녀의 집은 고요했다. 평온히 누워있는 그녀의 숨소리만 희미하게 들려왔다. 나는 바닥을 간단히 쓸고, 한 시간 정도 환기를 시킨 후, 벽에 걸린 달력에 오늘을 찾아 표시했다. 불은 켜지 않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난 달에서 왔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