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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락서 Jun 15. 2017

왜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 인생이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김영하

https://youtu.be/Wv3GSVrVNtc

왜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 인생이란.


  요즘 어때요? 잘 지내세요? 별일 없죠?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라면 마치 수학공식처럼 나오는 질문입니다. 대답 역시 공식적이죠. 어, 잘 지내지. 뭐, 그냥 지내. 물론 잘 못 지낸다고 대답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실제 그렇게 대답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더욱이 진지한 표정으로 잘 못 지낸다고 답하면 분위기는 순식간에 무거워지겠죠.


  여러분은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먼저 바라건대 우리 모두 잘 지냈으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죠. 유토피아가 아닌 세상을 사는 우리 모두가 잘 지내기란 어려움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먼저 잘 지내시는 분들은 계속 가능한 오래 잘 지내시길 바라며, 지금은 그렇지 못한 삶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인생은 참으로 역동적으로 보입니다. 주인공들의 삶은 조용할 날이 없습니다. 지루할 틈이 없이 사건이 생기고 시간은 흘러가죠. 실제 우리의 삶은 어떤가요? 조용할 날 없었던 학창시절을 지나 지금도 여전히 다사다난한가요? 혹시 반복되는 일상이 지겹게 느껴지진 않으신가요? 어제와 오늘의 모습이, 생활이, 생각까지 별다를 것 없다고 생각하시진 않으신가요?


  그렇다면 우리는 그런 삶을 무료하다고 이야기합니다. 특별한 일이 없어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지루한 그래서 무료한 삶이라고 이야기하죠.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인생의 무료함을 느끼는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속의 ‘나’는 소설가로, 바로 이런 이들을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 중에 자신의 고객이 될 사람을 찾아냅니다.


나는 사람들이 무의식 깊은 곳에 감금해두었던 욕망을 끄집어내고 싶을 뿐이다. 일단 풀려난 욕망은 자가증식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상상력은 비약하기 시작하고 궁극엔 내 의뢰인이 될 소질을 스스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을 하기에 그리도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고객을 찾는 것일까요. 말하자면 ‘나’는 자살 조력자입니다. 인생에 지루함을 느끼고 있고 그런 삶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욕망을 지닌 이들을 찾아 그들의 욕망을 실현시켜주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나’가 자살에 대해 전혀 생각이 없는 사람을 일부러 꼬셔 자살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진지하게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정말로 원한다면 필요한 방법을 상세히 안내하죠. 도중에 그만두어도 절대 강요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이쯤 되면 아주 친절하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나’의 고객은 다양하지만 그중 먼저 클림트의 ‘유디트’를 닮은 ‘세연’에 대해 말해보죠. 그녀는 특이합니다. 특이하다는 말로 부족할 만큼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여자입니다. 세연은 뜬금없이 북극 이야기를 하며 북극에 가고 싶다고 하기도 하고, 거짓말을 쉽게 하고, C를 옆에 둔 채로 자위를 하고, 섹스를 하면서도 언제나 막대사탕을 입에 물고 있습니다.


  세연은 삶이 그다지 맘에 들지 않습니다. 그녀는 방향 없이 떠돌며 여기저기 제멋대로 움직이는 삶에 염증을 느끼죠.


  “그게 그거지. 우리가 떠다니든 북극점이 움직이든 결국은 마찬가지 아냐? 그럴 때 없어? 길거리를 걷다가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두리번거릴 때 말야. 여기가 어딜까 하면서.”


  학창시절 신앙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입관 체험에도 그녀는 관 속에서 누워 있는 것이 너무 편안해서 나가고 싶지 않았다고 이야기했던 세연입니다. 그러니 폭설로 강원도 도로 어디인가에서 C와 함께 차 안에서 고립되었을 때, 그녀는 나가고 싶어 하지 않죠. 정작 C가 잠든 사이 세연은 목적지였던 자신의 고향 주문진과 정반대 방향으로 홀로 사라집니다. 무료한 인생에서 자신을 흥분시킬 것을 찾는 데에 지쳤던 세연에게 마로니에 공원에서 마주친 낯선 ‘나’의 제안은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겠죠. 입에 물고 있던 사탕까지 내버릴 정도로.


그때 유디트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면모를 그녀는 보여주고 있었다. 생기. 그녀는 나와 만난 후 처음으로 얼굴에 생기를 띠고 있었다.
  “갑자기 신이 나는 거 있죠. 내게 인생이란 제멋대로인 그런 거였어요. 언제나 내 뜻과는 상관없는 곳에 내가 가 있곤 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달라요.”
미세하게 들뜬 유디트를 바라보면서 나는 다시 한번 내가 하는 일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었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입에 추파춥스를 물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나’가 소개한 많은 방식 중 가스를 선택해 자살합니다.


  ‘나’의 또 다른 고객은 ‘미미’라는 여성입니다. 그녀는 행위 예술가죠. 늘 해오던 것처럼 퍼포먼스를 하고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던 겨울밤.. 낯선 남자가 다가와 클림트를 좋아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그녀는 좋아한다고 대답하고, 그 남자와 이틀을 보내고 자살을 결심합니다.


십 년이 넘게 해오던 동안 난 내가 진짜 예술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날 문득 그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을는지도 몰라. 단 한 번도 나를 들여다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어디론가 계속 도망치고 있는 기분으로 나는 평생을 살아왔던 느낌이었어. 여기가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나는 이러저러한 것들로부터 계속 도망치고 있었던 거지.


  욕조에서 손목을 긋는 방법을 선택한 미미의 첫 시도는 실패합니다. ‘나’는 그녀를 진정시키고 그동안 절대 하지 않았던 일을 해보기를 권유하죠. 그래서 그녀는 비디오 아트를 하는 C와 자신의 작업을 녹화하기로 합니다. 단 한 번도 자신의 작업을 녹화해서 본 적이 없었고, 그러지 않으려 했었기 때문이죠. 작업 후 그 결과물을 눈으로 본 그녀는 영원할 자신의 복제품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자신과는 상관없이 끊임없이 복제될 비디오 속 모습, 그리고 그 비디오의 소유가 자신이 아닌 C에게 있음을 견딜 수 없었죠. C는 미미의 모습을 담은 테이프에 끝없이 집착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게 마치 자신의 도피처라도 되는 양. 자신이 가둔 프레임 속의 그녀를 탐닉합니다.


길을 걸어도 프레임으로 시야를 구획하고, 비디오에 담겨진 것들, 자신이 편집한 것들을 그의 두 눈으로 본 것보다 더 신뢰한다, 아니 애착한다. 그리하여 비디오는 다시 그의 무기가 되고, 작지만 안전한 도피처가 된다.


  C는 자신이 만들어낸 현실에 안주하는 존재입니다. 이에 조롱하듯 미미는 작품 전시 날 C의 영상 앞에서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내는 퍼포먼스를 보입니다. 영상 속의 그녀는 절대 자신이 아님을 C에게 눈으로 보여준 것이죠.


그는 비척거리는 발걸음으로 화랑을 나와서 인사동 거리를 걸어갔다. 어느 찻집이든 찾아 들어가 따듯한 녹차라도 마셔야 할 것 같았다. 그는 등뒤에서 미미의 목소리를 들었다.
  “나는 쓰러지는 쪽으로 핸들을 꺾었어. 이제 페달을 힘차게 구르기만 하면 어디로든 가버리겠지.”
  미미는 검은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다.
  “그런데 넌 아니었어.”


  그리고 미미는 역시 ‘나’의 도움을 받아 욕조에서 손목을 그어 자살합니다.


  ‘나’가 소개한 고객은 세연과 미미 두 명입니다. 하지만 이 둘 말고도 이야기 속에서 등장하는 쓰러지는 쪽으로 핸들을 꺾은 혹은 꺾으려는 인물들도 있죠. ‘나’가 베니스에서 만난 에비앙을 마시면 토하는 홍콩 여자. 그녀는 구역질 나는 자신의 삶에서 도망쳐 여행을 하고 있었죠. 혹은 C의 동생이자 유디트의 전 연인이었던 K. 택시를 운전하던 K는 C의 작품을 보고 구역질을 느끼며 언제나 마지막 순간에 망설였던 엑셀을 밟겠다고 이야기합니다. C를 제외한 모두 삶의 무료함에서 벗어나려는 존재들이죠.



  아, 인생이 본질적으로 무의미하고 무료한 것이라면? 물론 인생에 대한 이런 가정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매 순간은 아니더라도 분명 가슴 저리게 느껴지곤 하는 삶의 무료함을 부정하기는 힘듭니다. 바라던 모든 것들이 무너지는 순간,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때, 인생에 의미란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메웁니다. 그러면 이런 지긋지긋한 삶을 탈출하고픈 욕망은 지극히 당연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욕구는 본능처럼 내면에 자리 잡고 있겠죠. 설령 그것이 진실이라고 해도 인생의 무의미함이 반드시 자살이라는 결말로 귀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무의미한 삶 속에서 나름의 의미를 만들어 살아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죠.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짧지만 강렬합니다. 당연하게 생각해오던 주어진 삶에 대해 의문을 던지게 하니까요. 인생에 대한 어떤 가정이 맞건 틀리건 정답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어차피 우리는 영영 알 수 없을 테니 말이죠. 다만 그렇기에 여러 방면에서 인생을 살펴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희망만을 이야기하다가 절망의 존재를 까먹어서는 안 되니까요. 시간이 된다면 그리고 제게 기회가 온다면 이 책에 대해 그리고 삶에 대해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싶어지는 작품입니다. 앞으로 <마라의 죽음>, <유디트 1>, <사르다나팔의 죽음>을 보면 ‘나’, 세연, 미미, C와 K가 떠오를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골목길 모퉁이 혹은 공원 아니면 미술관 등 어디에선가 ‘나’를 만날 수 있을까요? 그는 제게 어떤 말을 건넬까요? 그리고 저는 그의 고객이 될 수 있을까요?


  셰익스피어는 이렇게 말했다 한다. “죽음이 감히 우리에게 찾아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그 비밀스런 죽음의 집으로 달려들어간다면 그것은 죄일까?” 위대한 극작가보다 훨씬 후대에 시인, 실비아 플라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피의 분출은 시(詩)이다. 그건 막을 도리가 없다.” 그 시를 쓴 그녀는 가스오븐의 밸브를 열어놓고 자살했다.
  내 고객들도 실비아 플라스 같은 문재(文才)를 지니지 못했을 뿐, 삶의 마지막을 그녀만큼의 아름다움으로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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