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의 열림
굉장히 안 좋은 상태의 며칠이었다. 프로젝트를 끝내고 도쿄여행을 다녀온 후 뭔가 이상한 번아웃에 다시 빠져든 것이다. 정말 소름 돋게도 1년 전 번아웃 상황과 비슷했다. 뭔가 강제적으로 해야 할 일이 없다 보니 다 풀어진 기분이었다. 또다시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고 술을 마시고 그냥 퍼져버리는 일상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렇다 보니 자괴감이 미친 듯이 몰려들었다. 1년을 그렇게 고생하면서 쌓아놓은 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다 허망했다. 정신이 무너지니 생활이 무너지는 것을 다시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래도 그동안의 반복 실행으로 읽고, 쓰고, 운동하는 것은 겨우겨우 놓지 않고 버티고는 있었다. (습관이 무섭기는 하다.)
하지만 다시 숨구멍을 열어준 계기가 생겼다. 그것은 바로 유발 하라리의 <넥서스>였다. 친구들과의 독서 스터디를 하기 위해서 읽기는 해야 해서 억지로 읽고 있었다. 이번 주 분량 안에 스탈린의 전체주의 내용이 있었다. 거기서 독재 시스템의 폐해를 읽다가 갑자기 나 역시 너무나 전체주의적으로 생활을 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재 정부의 리더가 암살당하면 체제가 무너지듯이, 나의 시스템 중 하나가 작동을 하지 않으니 다른 것들도 연속적으로 붕괴된 것과 비슷했다. 갑자기 스탈린이 궁금해졌고 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그날 저녁 바로 도서관으로 뛰어갔다.
도서관에서 스탈린의 책을 집은 찰나 옆에 도쿠가와 이에야스 전기가 눈에 띄었다. 그의 이름만 알았지만 직관적으로 이 책도 봐야겠다고 빌려왔다. 동시에 레이 커즈와일의 AI 기술 혁명을 이야기한 <특이점이 왔다>와 사이토 다카시의 <일류의 조건> 같이 빌렸다. 모든 선택은 그냥 직관이었다. 나는 그날 저녁 동시에 이 책들을 번갈아 읽었다. 그리고 나의 뇌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는데 돌파구를 찾으려는 나의 직관이 발동한 것은 분명했다.
그렇게 며칠 동안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시작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오다 노부나가의 일본 통일 시대의 흐름을 이해했고 동시에 레이 커즈와일의 2045년 기술 폭발로 인한 '특이점'의 해체적 세계 예측을 이해했다. 그리고 사이토 다카시의 <일류의 조건>을 읽으며 미시적 거시적 관점에서의 유연함에 대해 깊은 인사이트를 얻게 되었다. 심지어 요 몇 달간 본 여러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 귀멸의 칼날, 체인소맨, 주술회전)의 내용과도 연결되고 혼합되면서 나의 뇌는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고민을 하고 생각을 하고 결론을 내리고 다시 그 결론을 뒤집어 보고 정말 정신은 혼돈 그 자체였다. 하지만 즐거웠다. 예전의 번아웃과는 다른 행태였다. 그리고 생각보다 뭔가 빠져나오는 시기가 빨라진 것 같았다. 심지어 기세도 달랐다. 1년의 고행이 헛되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미친 듯이 휘몰아치다 결국 료멘 스쿠나의 말이 심장에 박히고 마쓰이 타타미스의 구조가 머리를 울리며 비로소 내 모든 생각이 집대성된 새로운 결론에 도달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원래 추구했던 '클래식 아방가르드를 현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첫 단계는 바로 '구조 조정 및 체질 개선'을 한다로 실행 방안이 도출되었다.
위기는 기회였다. 또다시 깊은 절망감에 빠졌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단련된 직관은 헤쳐나가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있었으며, 그동안 쌓아 온 '삶에 대한 굶주림'은 결국 감각을 열어주는 기폭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