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게 하는 것
움직이지 않는 이유는 명확하다. 바로 압박감과 두려움이다. 인간은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미래를 예상하는 시스템이 기본 탑재되어 있다. 아마 조상으로부터 착실히 쌓여 온 DNA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두려움은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였다. 두려워하지 않는 종들은 살아남지 못했다. 하지만 너무 두려워하는 종들도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되었다. 너무 두려워하지 않는 것도 너무 두려워하는 것도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에는 적당한 자신감과 적당한 경계심을 가진 자들만이 살아남았던 것이다. 어느 한쪽에도 매몰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중용인 것일까.
나 역시 자신감과 경계심 즉 두려움이 혼재되어 있는 인간이다. 어떻게 보면 적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깐 3억 분의 1이라는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살아남아 수정이 되어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다. 심지어 출생 이후 지구 환경과 인간 사회에 잘 적응해서 아직까지 건강하게 잘 살고 있다. 그러나 욕심인 것일까. 적당히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는 않다. 뭔가 생명을 충만하게 느끼면서 도전적으로 살고자 하는 욕망이 강하다. 반면 외부 환경의 혼돈과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하며 평안하게 은둔하고자 하기도 한다.
사실 육체라는 물리적 한계를 가진 인간은 50:50 같은 수학적인 완벽한 밸런스는 불가능하다. 어느 한쪽으로 항상 치우쳐 있기 마련이다. 심지어 그 치우침은 고정된 것도 아니다. 외부적 영향이나 내적인 변화에 의해서 자신감과 두려움의 저울은 항상 변동된다. 자신감이 높은 시기에는 육체적 움직임이 많고 두려움이 많은 시기에는 정신적인 움직임이 많다. 어떤 시기가 더 좋고 나쁘다는 없다. 그냥 그런 시기일 뿐이다. 하지만 안 좋은 시기라고 평가되는 것의 기준은 결국 두려움의 비율이다. 두려움이 높을수록 좋지 않다. 육체적으로 많이 움직여도 두려움이 많다면 자기 파괴적일 수 있고 정신적인 활동이 많은데 두려움으로 점철되었다면 자기혐오에 빠질 수 있다. 그런데 경험적으로 보자면 정신적으로 두려움에 지배되는 것이 더 안 좋기는 하다. 그래서 자기 파괴적이라도 차라리 신체를 움직이는 게 낫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요약하자면, 어쨌든 두려움의 가장 빠른 해독은 육체적 움직임이다. 정신적으로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물리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해결이 나지 않는다. 물론 극단으로 갈 필요까지는 없다. 적당한 자신감만으로도 충분하다. 적당한 두려움도 자리를 줘야 한다. 하지만 방향성은 확실하다. 육체다. 육체의 움직임을 돕되 정신은 평안하게 적당히 제 역할을 하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