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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s Aug 08. 2020

예테보리에 사는 일

3. 익숙한 맛

엘리베이터가 없다는 사실에 경악하며 2층까지 짐을 들어 나르고, 비로소 배정받은 방문을 열었을 때 무의식적인 한숨 한 줄기가 튀어나오는 것을 막지 못했다. 따듯한 물로 피로를 씻어내고 침대에 누웠을 때의 그 안도감은 지금까지 경험했던 어떤 감정의 이상인 무언가였다. 온몸이 버터처럼 녹아 침대에 흡수되는 듯했다. 샤워하는 동안 충전해두었던 휴대폰을 켜고 마침내 안정적인 와이파이 신호를 잡아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이때 우리나라는 아침 9시. 막 잠에서 깨신 엄마와 잠깐 동안 안도의 통화를 나눴다. 너무 피곤했던 나머지 우리가 정확히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마도 "나는 잘 도착했다. 아픈 기운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한쪽에서 뜨는 해가 다른 한쪽에서 지고 있는 것이 신기하다. 앞으로 행복하게 잘 지내고 돌아가겠다."




다음날 아침, 시차 적응을 하지 못해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깬 나는 누군가 선물해준 텀블러에 우린 따뜻한 녹차 한 잔으로 지친 마음을 깨웠다. 이제는 완전히 도착했다는 생각에 안도하며 한기가 스며드는 창밖을 보았다. 눈이 조금 쌓여 얼어붙은 잔디 마당이 눈에 들어왔고, 아직 이른 아침 이어서일까 인기척 대신 스칸디나비아의 차가운 바람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모르겠다. 그곳에서 잘 살아남겠다 다짐은 했지만, 도대체 어떻게? 전혀 모르겠다. 처음 며칠간은 집에서 가져왔던 참치 캔과 김자반으로 식사를 때우기 일쑤였다. 누가 보면 내 뱃속에는 고양이가 살고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저 살기 위해 사는 것. 그 정도였다.


이틀 정도가 흘렀을까, 고양이 생활에 진절머리가 나기 시작했다. 참치캔을 씻어서 버리기 위해 숙소 3층에 있던 주방으로 올라갔을 때 스페인에서 왔다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한 친구를 만났다. 그는 그곳이 자기 집 주방인 것처럼 냉장고 한 구석에 망설임 없이 초록 사과를 채워 넣고,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내가 들어갔을 때 손에 들려 있던 참치캔이 의아했는지 강한 스페인 톤이 묻어나는 인사와 함께 내게 물었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 "그게 네 아침밥이야?"


나는 부끄러워 말 끝을 흐렸다. 사실 오늘 아침밥뿐만 아니라 지난 3일간의 식사가 모두 비슷한 꼴이었다고. 그 친구의 한 마디는 분명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나에게 일깨워주기에 충분했다. 참치캔을 깨끗이 씻어 버리고는 문득 밖으로 나가기 위해 발을 돌렸다. 익숙해져야만 한다는 생각이 어느샌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해야 할 일이 불현듯 떠오르기 시작했다. 첫날밤 걸어왔던 길을 다시 걸으며 되뇌었다. 몇 시간 동안 온 동네를 걸으며 필요한 모든 것을 눈과 기억에 담았다. 슈퍼마켓이 어디에 있는지, 공원은 어디에 있는지, 한 학기 동안 다닐 학교는 어떻게 생겼는지. 


돌아오면서는 장을 봤다. 슈퍼마켓에는 예상보다 익숙한 재료들이 많았다. 돼지고기, 감자, 양파, 대파... 그리고 참기름과 간장. 반갑다. 이제부턴 식사다운 식사를 직접 해 먹고 말겠다 다짐하고는 생각나는 재료들을 전부 다 주워 담기 시작했다. 어느새 묵직해진 장바구니를 들고 뒤뚱뒤뚱 집으로 돌아와 곧장 주방으로 올라갔다. 아침에 그 친구가 했던 것처럼 냉장고의 한 구석을 내 것으로 만들고는 생각해뒀던 재료들을 꺼내 도마 위에 올렸다. 탁탁. 칼이 도마를 내리치는 이 소리는 고양이라면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무언가다. 그렇게 만들어낸 첫 끼는 고추장찌개. 오랜만에 행복했다.


그날부터 한국에 돌아오는 날까지 내가 있는 주방은 항상 맛있는 소리와 냄새로 가득 찼다. 사람 사는 냄새. 그곳의 친구들은 지금도 나를 'Chef Choi'라고 부른다. 이다음에 돌아와 식당을 차리자고, 이름은 'CHOIs'가 어떻겠냐고. 그렇게 간간히 연락해주는 친구들이 참 고맙다. 다시 가서 밥 한 끼 해줄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첫 끼에 먹었던 고추장찌개의 레시피를 간단하게 적어보고 싶다. 스웨덴 생활에 적응할 수 있게 해 준 일등공신인 찌개 한 그릇이다. 국물보다 건더기가 많은, 밥을 말아먹는 것이 아니라 비벼먹어야 할 만큼 되직한 국물이 일품인 찌개이다. 혹시 그 맛이 궁금한 독자라면 집에서 한 번 만들어 먹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오늘 저녁은 따끈한 찌개 한 그릇으로 지친 마음을 데워 보는 것을 추천한다. 괄호 안에 있는 재료들은 생략해도 무방하며 양념류는 2인분을 기준으로 한다.


재료 : 돼지고기 목살, 감자, 양파, 마늘, 애호박, 대파, (두부), 고추장 두 큰 술, 고춧가루, 참기름, (멸치액젓)


0. 마늘은 다지고, 그 외의 모든 재료는 한 입 크기로 썰어 준비한다.

1. 한 입 크기로 자른 돼지고기 목살을 고추장과 고춧가루에 버무린 후 냄비에 참기름을 넣고 약불로 볶는다.

2. 고추기름이 어느 정도 우러나면 물을 붓고 강불로 올려 끓인다.

3. 물이 끓으면 썰어두었던 감자, 애호박, 양파, 다진 마늘, (두부)를 순서대로 넣고 끓인다.

4. 감자의 전분으로 국물이 원하는 농도가 되었다면 대파, (멸치 액젓 반 큰 술)을 넣고 한소끔 끓여 마무리한다.

5. 밥과 함께 비벼 맛있게 즐긴다.


*돼지고기 대신 참치캔을 사용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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