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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s Aug 15. 2020

이사

4. 이름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한 순간 지나치지만 꼭 기억에 남겨두고 싶은 사람이 있다.  아이의 아버지라 자신을 소개했던 이름이 도무지 기억나지 않아 미안해지는 그런 사람. 어쩌면 그 이름은 아빠였을지 모르겠다.


1월 말의 어느 날. 걱정하고 있었던 이삿날이 결국 오고 말았다. 그때까지 살고 있었던 곳은 임시숙소였고, 그날은 앞으로 4개월을 살아야 할 기숙사로 이사하는 날이었다. 눈이 아주 많이 오는 날이었다. 눈발을 헤치고 첫날 들고 왔던 짐을 그대로 끌고 갈 생각을 하니 출발하기 전부터 팔이 아팠다. 그랬기에 그곳에서 더 오랜 시간 보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마지막이라는 핑계를 대서라도 어떻게든 시간을 지체하고 싶었다. 침대를 정리하고, 화장실을 청소하고, 커튼을 치고, 차를 우려 마시며 창밖의 눈을 그저 바라보기도 했다. 출발할 시간이 다가올수록 한숨이 늘었다.


비록 십수 일뿐이었지만 벌써 정이 들어버린 그 작은 주방과도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사두었던 향신료와 간장을 비닐봉지에 꼭 담아 챙겼고,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초록빛 사과를 한 개 집어 먹었다. 그중 남겨진 몇 개는 그 이름 모를 스페인 친구의 것이 되었다. 그 친구와는 악수를 나누며 그동안 주방의 매운 냄새를 참아주느라 고생했다는 우스갯소리를 해대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자주 썼던 냄비와 도마, 칼을 깨끗이 설거지해 말려놓고 나올 때쯤에는 핀란드에서 왔다는 한 여학생과 문 앞에서 마주치기도 했다. 아주 잠깐이었던 그 인사에서 그녀는 오늘부터 이곳에 살게 되었다고, 반갑다고 말했던 것 같다. 그녀의 부모님이 함께 오셔서 짐을 옮겨주시는 모습이 잠깐 눈에 스치기도 했다. 부러웠다. 얼마 후에 그들은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마도 내가 비워둔 그 냉장고의 한 구석은 그 친구에게 돌아갔을지. 또 한 번의 이름 모를 아쉬움을 뒤로하고 대문 밖을 나섰다.




이미 발목 위로 쌓인 눈을 헤치고 길거리로 나가기 위해 애를 썼다. 양손에는 또다시 내 몸무게만큼이나 무거운 짐이 질질 끌려오며 지나온 길에 선명한 자국을 남겼다. 이따금 만나는 계단과 언덕 앞에선 깊은 한숨이 만들어낸 안개가 시야를 가리기도 했다. 문득 내리막 길을 만났을 때의 그 반가움도 잠시. 이내 짐이 나를 끌고 가기 시작했고 곧 바퀴가 헛돌며 나와 함께 고꾸라졌다. 마침내 큰 길가의 평지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온몸에 더 이상의 기운이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결국 다음 언덕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나는 손을 놓고 가만히 멈춰 서고 말았다. 발은 이미 눈에 젖어 감각이 무뎠고, 상체는 버드나무 잎처럼 축 늘어져 살포시 내리는 눈을 온 등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문득 앞의 언덕길에서 눈을 치우고 있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길가에 세워둔 파란색 다마스와 비슷하게 생긴 차 옆에서 한가롭게 빗자루로 인도에 쌓인 눈을 쓸어내고 있었다. 열려 있는 트렁크 안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다시피 비어 있었다. 이 남자는 저 빗자루 하나만 가지고 눈을 치우는 건가. 저 정도 공간이면 내 짐도 들어갈 것 같은데... 도와달라고 할까... 나는 문득 염치없이 입 밖으로 튀어나온 혼잣말에 한치의 부끄러움을 느낄 기운조차 없어 그저 멍하니 그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쩌면 내 말을 들으셨던 것일까.(제발 아니었으면 좋겠다.) 아니면 무의식 중에 나와 눈이 마주쳤던 것일까. 그가 문득 빗자루질을 멈추고 내게 물었다.


"어디 가요?"

"기숙사에 가는 길이에요. Medicinaregatan입니다."

"이 큰길 말고 저기 뒤에 왼쪽 골목의 계단으로 가봐요. 거기가 훨씬 빠를 거예요."


그곳을 보니 길 옆에 왠 깎아지른 계단이 하나 있었다. 또 계단이다. 이걸 좋은 충고라고 해야 할지 순간 고민했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기숙사에 도착할 수 있겠다는 희망 아닌 희망을 품고 발길을 옮기기엔 충분한 말이었다. 계단 앞에 낑낑거리며 도착했을 때쯤 아마도 사내는 일을 마쳐 빗자루를 트렁크에 무심히 던져 넣고 차에 탔을 것이다. 차에 시동이 걸리고 바퀴가 눈을 밟는 뽀드득 소리가 들려올 때쯤 나는 계단을 오르기 위해 심호흡을 깊게 했다. 문득 들려오는 커다란 발소리에 뒤를 돌아봤을 때 비로소 그 파란 다마스가 나에게로 후진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빗자루가 트렁크에서 울퉁불퉁한 눈길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듯 차를 요란하게 쳐댔다. 그는 한 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 창밖으로 몸의 반절을 내밀고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차를 가리키며 내게 신이 난 듯 웃으며 소리치고 있었다.


"얼른 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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