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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s Aug 23. 2020

Fika

5. 새로운 가족

스웨덴에는 fika라는 꽤나 특이한 문화가 있다. 스웨덴 문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그들만의 전통이다. Fika란 간단하게는 커피 브레이크(coffee break) 또는 티타임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식후에 후다닥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시는 것과는 전혀 다른 시간이다. 식사 시간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또 다른 휴식 시간인 셈이다. 때에 따라선 30분을 훌쩍 넘길 때도 있어서 사람들은 편안하게 일과는 거리가 먼 굉장히 개인적인 주제로 대화를 나눌 때가 많다. 덕분에 스웨덴인들은 서로에게 집중하며 친밀감을 쌓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단순한 직장 동료에서 친구가 되곤 한다.


내가 본 fika에는 항상 따뜻한 블랙커피 한 잔과 시나몬롤이 준비되어 있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 그동안 업무에 지쳐서 하지 못했던 일상의 여유로운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눌 수 있던 그 모습은 너무나 보기 좋았던 풍경으로 기억된다. 그 덕분에 스웨덴에서 함께 살아갈 가족을 만나기도 했으니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한 시간이었음이 분명하다.


문득 궁금해서 친구에게 물은 적이 있다. 왜 항상 블랙커피에 시나몬롤이냐고.


"글쎄, 맛있으니까!"



1월 말 개강날이 다가왔다. 학교에서 준비한 교환학생 일정들에도 하나둘 참여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나는 혼자였으니, 모든 것이 새롭고 무서웠는지 모른다. 전날 밤에 미리 강의실 위치를 알아두었고,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미리 학교까지 가는 길을 걸어보았다. 나는 길치가 아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참여했을 때 문득 두렵기 시작했다. 강단에 서 있는 저 키 큰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들리지가 않았고, 옆자리에 있는 노란 머리들이 익숙하지가 않았다. 아직까지도 한국 사람이 단 한 명이 없다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동네인가! 우리나라가 지겨워 떠나온 곳이지만 아마도 내가 사람들까지 그렇게 미워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도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 몇 명이라도 있다면 큰 위안이 될 것이라 기대했던 마음은 어느새 실망감으로 변해 있었다.


사실 한국을 떠나기 전부터 가장 걱정했던 부분이 바로 이거였다. 같이 떠나기로 했던 다른 지원자가 탈락하는 바람에 나 혼자 가야 한다는 메일을 전달받았을 때 왜인지 모를 위기감이 생겼다. 그리고 그 위기감을 눈앞에서 목격했을 때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도대체 이 바이킹들 사이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도대체 어떻게 친해져야 할까. 난 왜 영어 공부를 제대로 안 했을까...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어서 키 큰 강사가 도대체 무슨 말을 했는지 제대로 듣지를 못했다. 아마도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대충 알려주지 않았으려나. 일정표를 보니 오리엔테이션이 끝나면 밖으로 나가 신분증을 등록할 시간이 있을 예정이었다. 어서 걸음을 옮기려고 일어났을 때, 아까 그 키 큰 강사가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잠깐의 fika 이후에 신분증 등록 절차를 진행하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있는 순간에도 fika가 무슨 뜻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아마 다른 영어 단어를 잘못 들었을 것이라 생각하며 바깥으로 발길을 옮겼다. 강당 밖으로 나가보니 테이블 위에 블랙커피 여러 잔과 시나몬롤이 바구니에 담겨 잔뜩 올려져 있었다. 사람들은 어느새인가 네다섯 명씩 옹기종기 모여 자연스럽게 통성명을 하고 수다를 떠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오늘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저렇게 편하게 말할 수 있는지 그저 신기해하는 표정으로 나는 출입구 근처 문가에 기대어 있었다. 먼저 다가가기가 너무 무서워 차라리 누군가 먼저 말을 걸어줬으면 했다.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지만, 아무도 말을 걸어주기는 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다들 자기 테이블의 사람들과 수다를 떠느라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도저히 참다못해 마침내 그중의 하나에 합류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사람들 사이를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테이블 사이를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의 이야기에 집중해보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야 합류할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때 들려온 그들의 유창한 영어는 내 결심을 산산조각 냈다. 도저히 그 사이에서 그렇게 말할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결국 잠깐의 배회 끝에 제자리로 돌아온 나는 다시 망부석처럼 가만히 벽에 기대어 그 fika라는 시간이 끝나길 진심으로 기도했다. 그렇게 허수아비처럼 얼마나 서 있었을까. 여전히 사람들은 테이블에 서서 신나게 수다를 떨고 있었으니, 한참 멀리 동떨어진 나에겐 아무도 시선을 주지 않는 듯했다. 시간이 거의 다 되었을 무렵이었을까 나에게는 끼어들기를 접어두고 얼른 서류 등록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만이 남아 있을 때였다. 사람들 무리 사이에서 아까는 보지 못했던 어느 동양인 하나가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내게 다가왔다. 첫눈에 서로가 한국인임을 알아봤지만 문득 조심스러웠는지 모른다. 아니면 약간의 의심이 있었을까? 그가 내게 물었다. 영어로.


"Where are you from?"


너무나 반가워 울음을 터뜨릴 뻔했던, 정직하고 익숙한 그 발음.


새로운 가족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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