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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s Aug 29. 2020

오늘의 메뉴

6. 새로운 일상

스웨덴에 온지도 어느덧 한 달 두 달이 넘어갔다. 이제는 제법 현지의 삶에 적응한 것처럼 보였다. 나만의 취향이 생겼고, 익숙한 것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많은 일들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예테보리에서의 일상이라는 것이 생긴 셈이다. 


학교에 가는 날이면 어김없이 6시 30분에 알람이 울린다. 그때마다 스웨덴은 수업을 아침 8시부터 시작하는 무지하게 부지런한 나라라는 불만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잠에서 깨는 것은 그곳 이서도 여전히 힘이 들어 알람을 네다섯 개나 맞추어야 겨우 겨우 침대 밖 방바닥에 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방바닥의 차가움에 잠을 깨고 곧장 슬리퍼를 신은 뒤 공용 주방으로 갔다. 아침부터 요리를 하기는 너무나 귀찮았으니 매일 아침 muesli(뮤즐리, 시리얼의 한 종류)를 우유에 말아 한 그릇을 들이켜고는 밀린 설거지를 마무리했다. 그러는 동안 다른 방에 살고 있던 다른 스웨덴 친구를 항상 그곳에서 마주쳤다. 그도 매일 똑같은 빵 두 조각과 한 컵의 우유로 한 끼를 해결하 있었으니, 우리는 서로의 아침이 전혀 궁금하지 않았지도 모르겠다.


주방 정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오면 허겁지겁 학교에 갈 준비를 했다. 마트에서 파는 가장 싸고 양이 많은 샴푸로 머리를 감았고, 세수와 양치를 마치고는 머리도 덜 마른 채로 옷장을 열어젖혔다. 늘 그렇듯 청바지 하나와 두꺼운 윗옷 하나를 꺼내놓고는 머리를 말렸다. 아마도 전날 입었던 것일지 모를 그 옷들을 후다닥 걸치고 또 두꺼운 외투를 걸쳐 가리고는 문 밖을 나섰다.


집 앞의 medicinaregatan 역에서 트램을 타고 두 정거장 거리인 학교. 승차권 검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으니 가끔 교통카드를 두고 나왔을 때에는 그냥 무임승차를 하곤 했다. 지금은 몇 번이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인 그 트램에서 고작 5분이지만 많은 사람들 사이에 끼어 엎치락뒤치락하기를 반복했다. 가끔 타고 있는 주인을 닮아 커다란 강아지를 볼 때면 내가 다른 나라에 와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나는 듯하기도 했다. 그렇게 학교에 도착했다.


헉헉거리며 강의실에 들어서면 우리나라에서도 그랬듯이 피로가 몰려왔다. 수업 중에는 역시나 두세 번씩 졸기를 습관처럼 했고, 과제는 가끔 제출기한을 넘긴 적도 있었다. 교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는 우리말로 하든 영어로 하든 알아듣기가 너무 어려웠고, 강의실 맨 앞줄에서 열심히 발표하고 계산하는 다른 학생을 보면 여전히 경의롭기만 했다. 점심시간이 되면 학생회관의 가장 저렴한 음식점을 찾아 '오늘의 메뉴' 주문했고, 무료 음료 바에 있던 블랙커피를 정말 열심히 마시곤 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그날 요리할 재료들을 하나하나 사러 돌아다녔다. 물건별로 가장 저렴한 곳을 찾아다니며 장을 봤다. 고기와 치즈는 전통시장인 Saluhallen에서, 된장•고추장•간장 같은 우리나라 식재료는 아시안마트에서, 그리고 과일과 채소는 학교 앞에 있는 노점에서 구했다. 냉장고 안에서 재료가 상하는 것이 싫어 매일 필요한 만큼만 장을 보다 보니 집으로 가는 길이 항상 두세 배는 길어지곤 했다.


집에 도착해서는 바로 냉장고와 캐비닛에 재료들을 정리해두고 방으로 들어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약간의 휴식을 취하다 보면 어느새 저녁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뱃속에서 소리가 나기 전에 오늘은 무엇을 먹어야 하나 고민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선 밥을 사 먹었고, 빨래도 세탁소에 맡겼다. 스웨덴에서의 새로운 일상은 적어도 그것보다는 분주했다. 매일 해야 하는 일이 더 많아졌고, 그마저도 도움받을 곳이 마땅치 않아 스스로 해결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럼에도 이런 삶이 그리 나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나름대로 마음에 들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였다.


매일 반복되는 틀에 박힌 삶이 싫어 이곳으로 떠나왔다. 이곳의 새로운 삶이 따지고 보면 그렇게 많은 신선함을 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마도 새롭게 짜인 일상의 올 하나하나를 내가 직접 기웠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적어도 내가 피곤할 때 하루 정도는 마음껏 쉴 용기가 생겼고, 외로워 가슴이 답답할 땐 뒷산에 밤늦게 걸어 올라 술 한 잔에 지는 해를 담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적어도 내가 정말로 먹고 싶은 저녁밥을 내가 직접  수 있었다.


이 모든 게 우리나라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는 것에 깊은 후회를 하곤 했다. 혼자가 되고 나서야 스스로를 돌보는 방법을 알아가게 되었다는 것.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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