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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s Aug 01. 2020

걸어야만 한다

2. 무계획의 도착

두 시간이 지났다. 휴대폰은 이미 방전 직전이었고, 피로에 젖은 몸은 생각대로 가누기가 힘들 정도였다. 아마도 내 옆자리에 있던 어느 승객은 나를 몰상식한 동양인 취객으로 오해했을지도 모르겠다. 겨우겨우 탑승한 예테보리행 비행기는 기체가 너무 작아서 양 옆에 제트엔진이 아닌 프로펠러가 장착되어 있었다. 나중에 같은 기종을 타보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비행기는 너무 가벼운 나머지 대기가 조금만 불안정해도 엄청난 굉음과 함께 흔들린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날의 나는 쌓여 있던 피로 덕분에 깊은 잠에 빠졌다. 도착 안내방송이 나오기 전까지 기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것도 알 방법이 없었지만 무사히 착륙했으니 그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내가 자고 있어서 화장실에 가지 못한 승객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사과하고 싶다.) 의도치 않았던 편안한 비행과 함께 나는 예테보리 땅에 두 발과 두 캐리어를 내렸다. 동남아시아 밖으로는 단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었던 한 아이가 대륙의 반대쪽 끝에 도착하는 순간이었다.


탁! 탁!


잠결에 짐을 찾았고, 언제 검사받았는지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는 여권에는 스웨덴을 닮은 푸른 도장이 하나 찍혀 있었다. 'Göteborg Landvetter'. 내 몸만큼 커다란 캐리어 두 개를 끌고 어깨엔 또 두 개의 배낭을 짊어진 채로 출국장을 나섰을 때 비로소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다. 시내에 가는 교통편을 몰랐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공항철도에만 익숙해져 있었던 터라 타국에 갈 때에는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교통편을 미리 알아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걱정이라는 것을 가득 품어야 할 상황이었지만, 문득 행동이 생각을 앞서기 시작했다. 때로는 우리의 몸은 머리보다 똑똑하다. 난 이미 다른 승객들이 가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그들이 하는 대로 맥도널드에서나 볼법한 키오스크 화면을 터치해 공항버스 티켓을 구매하고 있었다. 키오스크에선 스웨덴어 안내문구가 흘러나왔지만 상관없었다. 어디에서 내려야 하는지 몰랐으니 가장 멀리까지 가는 표를 구매했다. 언제부터인가 오한과 졸음은 온데간데없이 맑은 정신만이 남아 있었다. 살아남아야겠다는 일념으로 각성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어떻게든 숙소에 도착해야만 했다.




시내에 도착한 후에도 다른 문제들이 발목을 질끈 붙잡았다. 버스 기사님의 도움으로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역인 korsvägen 역에 하차했을 때 그곳은 겨울밤의 체르노빌 같았다. 사람이라곤 한 명도 찾아볼 수가 없었고, 황량한 거리 앞에 놀이동산으로 보이는 곳의 대관람차 하나만이 내 앞에 우뚝 서 있었다. 스웨덴에 온 것을 환영한다고 말하려는 듯 파란색과 노란색 조명을 밝힌 채 멈춰 있었다. 순간 나는 관광객이 되어 카메라를 꺼내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휴대폰을 꺼내 들어 열심히 화면을 터치해댔다. 잠깐의 설렘이 저지른 실수로 안 그래도 얼마 남지 않았던 휴대폰 배터리를 모두 소진하고 만 것이었다. 나를 도와줄 21세기의 마지막 수단을 그렇게 어이없 날려버렸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이미 버스나 트램은 운행 시간이 지난 지 오래되었다.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숙소에 가야 했으니 그 방법밖에 없었다. 다행히 숙소의 주소는 종이에 따로 적어 놓아 알고 있었다. 그 종이 한 장이 나를 살렸다. 이곳에 오기 전에 우리나라의 주소 시스템이 도로명주소로 바뀐 것이 내게 행운으로 돌아올 줄은 전혀 몰랐다. 생존 본능에 눈을 뜬 부랑자는 평소에 그렇게도 헷갈려하던 도로명 주소 찾는 방법을 똑바로 기억해냈다. '도로의 왼쪽엔 홀수, 오른쪽엔 짝수. 숫자는 순서대로. 이 길을 따라 쭉 가면 언젠간 숙소가 나온다.' 밤이 깊어 날이 더 추워질수록 숙소를 향한 발걸음은 더 빨라졌다. 어느샌가 더위에 장갑을 벗어던졌고, 언덕길을 오를 때면 짐을 끌고 있는 양팔과 어깨에 찢어지는 듯한 근육통이 느껴졌다. 


그렇게 아무도, 아무것도 다니지 않는 길을 한참 걸었다. 불이 켜진 집 몇개를 마주치기도 했다. 그 집에는 1월의 크리스마스를 축복하는 한 가족이 살고 있었을 것이다. 문득 그 문을 두드려 하루만 묵게 해달라고 말하고 싶은 감정이 새어나왔다. 에 가고 싶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마침내 저 멀리 표지판이 눈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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