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don, UK
귀여운 여인(Pretty woman, 1990)의 그녀는 사랑스러웠고, 클로저(Closer, 2004)의 그녀는 쓸쓸해 보였다. 아메리칸 스윗하트(America's sweethearts, 2011)의 그녀는 여전한 사랑스러움에 성숙함까지 더해졌다. 그 사이 무수한 필모그래피를 쌓으며 인정받은 연기력과 넓어진 스펙트럼이 한 몫했다. 이 모든 영화에 앞서 노팅힐(Notting Hill, 1999)이 있었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줄리아 로버츠(Julia Roberts)에 휴 그랜트(Hugh Grant)라니. 흥할 수밖에 없는 로맨틱 무비. 지난해,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던 그때에 그 노팅힐을 걸었다.
여행사진은 보면 볼수록 재미있다. 풍경을 찍으려고 인테리어를 찍으려고 음식을 찍으려고 한 건데, 의도치 않게 누군가가 찍혀있는 경우가 있다. 심지어 그 누군가가 자기 쪽을 찍는 나를 보고 있어 마치 카메라를 응시하는 것같이 나올 때도 있다. sns에서도 이런 해프닝을 다룬 포스트를 종종 볼 수 있는데, 소위 빵 터지기도 하고 소름이 돋기도 한다. 여행 사진 중에 이런 사진을 발견하면 기분이 좋아지곤 한다.
런던에서의 사진은 너무도 정적이어서 그런 재미는 특별히 없지만 맑은 날의 이곳은 어떨까-하는 생각을 계속 곱씹게 한다. 언제쯤 가면 맑은 날씨 일지, 맑은 날 그곳에서 무엇을 하는 게 좋을지 상상하는 재미가 있다.
노팅힐을 걷는 내내 날이 참 흐렸다. 비는 안 왔지만 비가 안 와서 다행이라고 하기 민망할 정도로 흐렸달까. 뭔가 안 어울리는 이름의 극장. 네온사인 아래 창문이 깜찍하다.
그 흐린 와중에 쨍하게 예쁜 빨간 문이 눈에 띄었다. 물에 젖은 듯한 색만 가득한 동네에 이런 새빨간 색이 있다니.
드디어 그 서점이다. 생각보다 별거 없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아무래도 작은 규모 때문이 아닐까. 규모야 작을 거란 걸 알고 있었는데, 영화 속 그 모습 그대로라 조금 놀랐다. 한껏 나이 든 모습일 줄 알았는데 말이다.
너무나 조용하고 착한 분위기라 찰칵거리며 사진 찍기가 꺼려져서 조용히 엽서 하나 사서 나왔다. 그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이 서점에서의 추억 하나쯤 있는 사람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궁금하다. 작은 옷가게도 있었고 온갖 소품을 모아 파는 가게도 있었다. 서점 말고도 내가 가고 싶던 곳이 두 곳 더 있었는데, 하나는 올세인츠 매장이었고 또 하나는 폴스미스 매장이었다. 폴스미스는 Paul Smith Western House라는 이름으로 구글맵에 나와있는데 주택인지 샵인지 헷갈리는 외관이었다. 내부 사진이나 후기 같은 것들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곳이라 더 기대가 되었다.
딱히 제지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디스플레이되어있는 공간 사진을 찍기가 조금 미안해서, 가방 하나를 긁으면서 자연스럽게 물어봤다. 혹시 매장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조심스럽게 묻자, 할아버지 테일러(매니저 정도 되시는 듯)가 모두 다 나가라며 손을 휘저었고 4명이나 되는 직원이 일사불란하게 입구 쪽으로 자리를 피해 줬다. 나는 민망해하며 아이폰6s를 꺼내 들었고.. 딱 두 장 찍었다. 다 찍었다고 쭈뼛쭈뼛 말했더니 다들 읭 하는 표정, 내가 dslr 아니 미러리스라도 꺼낼 줄 알았나 보다. 할아버지 테일러는 내 어깨에 걸쳐있는 Tom Dixon 에코벡을 보더니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에 꼭 가보라고 추천해주었다. 인테리어가 끝내주고 음식도 괜찮을 거라며 호들갑스럽게 묘사하는데 직원들은 그게 웃기는지 킥킥대고. 다음에 그곳에 갔을 때에도 계시면 사진 한 장 같이 찍어달라고 해야겠다. 아, 이날 산 가방은 아주 잘 들고 다닌다.
계단에서는 당당하게 몇 장 더 찍었다. 탐나는 액자들. 넋 놓고 보다가 굴러 떨어지겠다.
무수히 많은 사진에서 보았던 알록달록한 그 골목으로 향하던 중, 올세인츠 매장을 만났다.
때마침 세일이라 엄청 득템 할 줄 알았는데, 역시 세일할 땐 사이즈가 문제다. 가죽재킷을 산지 얼마 안 된 상태라서 니트류나 저지 원피스 정도를 사고 싶었는데 티셔츠 2장을 겨우 건졌다. 쓴 돈에 비해 머문 시간은 꽤 길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한국에서는 올세인츠 쇼핑을 포기해야겠다는 것. 세일을 안 해도 가격차이가 너무 난다. 시그니처 디자인인 묶음 디테일이 있는 아이보리색 티셔츠가 4만 원대라면 어느 정도 차이가 나는지 대충 감이 잡힐 일.
입구 재봉틀도 멋졌지만 지하의 오브제가 더 마음에 들었다. 벽돌로 채워진 벽면도 하수구를 떼다 박은 것 같은 선반 프레임도 마음에 들었다.
꽤 많이 걸었다. 평일 낮이라 해도 그래도 노팅힐인데 사람이 너무 적은 것 아닌가 생각했는데, 날씨 탓인지 원래 그런 건지 지금도 도통 모르겠다.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영화 속 이 골목은 북적북적 대고 자전거도 다니고 경적소리도 나고 그랬는데.
사실 그 당시에는 엄청 좋다던가, 떠나니 아쉽다던가 하는 감정이 크지 않았는데 지금 와서 보니 아쉬움이 가장 큰 동네가 아니었나 싶다. 다시 노팅힐을 찾게 되면, 할아버지 테일러께서 소개해주신 톰 딕슨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폴스미스 매장에 가야겠다. 그때 소개해주셔서 덕분에 맛있게 잘 먹고 구경도 잘 하고 왔다고 하면서 사진 한 장 같이 찍자고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