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한테만 보이는 흰 고양이,
순이

(본문 중 역할극)

by 백승곤

우진이의 걱정

오늘도 우진이는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달려갑니다. 집에 혼자 계시는 외할머니한테 또 무슨 일이 생겼을까 걱정되기 때문이에요. 몇 달 전부터 할머니의 이상한 행동이 잦아졌어요. 옷장 속에 TV 리모컨을 숨겨두고는 누가 가져갔다고 하시지를 않나, 저녁 식사 후, TV를 보다 갑자기 용돈이라며 엄마한테 휴지를 몇 장 꺼내 주시 지를 않나…. 마트에 간다고 나가신 할머니를 한참 뒤에 공원에서 찾은 일도 있었어요. 요즘 엄마, 아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할머니가 이상해졌어요

그저께 밤에는 주무시다 말고, 집에 고양이가 들어와 할머니를 노려본다며 소리를 지르셨어요. 하지만 진짜 사건은 어제 일어났어요. 장롱 밑에 숨어 있던 고양이가 할머니에게 달려들려 한다는 거예요. 할머니는 고양이를 쫓으려 손에 잡히는 대로 던지고 휘둘렀어요. 그 통에, 베란다에 있는 화분은 모두 엎어지고 깨졌어요. 거실에 있는 액자와 화병도 무사하지 못했지요.

깨진 화분.PNG


할머니 걱정 때문에 서둘러 집에 도착한 우진이가 아파트 현관을 열었습니다. “어휴~ 이게 무슨 냄새야.” 설탕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습니다. 할머니는 우진이가 좋아하는 ‘할머니표 떡볶이’를 만들어 주시려고 했어요. 그런데 고추장을 넣는다는 것이 설탕을 부어 버렸지 뭐예요. “할머니, 고추장을 넣어야지 설탕을 부으면 어떡해?” “어? 내가 설탕을 부었어?”


사랑하는 할머니

우진이는 초등학교 5학년이에요. 우진이 부모님은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와 가까운 상가에서 음식점을 운영하시죠. 아빠는 요리에 필요한 신선한 재료를 사러 매일 새벽 시장에 가세요. 엄마는 우진이를 학교에 보낸 뒤 음식점에 나와서 요리 준비를 합니다. 그렇게 집이 덩그렇게 비워지면, 외할머니는 청소며, 빨래며… 집안일을 도맡으세요. 어릴 때부터 우진이를 키워 주신 분은 음식점 일로 바쁜 엄마가 아니라 외할머니예요. 그런 외할머니가 요즘 이상해지셨어요. 그래서 우진이의 마음이 더 아프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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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도 낯선 ‘루이소체 치매’

엄마는 몇 달 전부터 보인 외할머니의 이상 행동에 놀라서 외할머니를 모시고 병원 신경과를 찾았어요. 의사 선생님은 정밀 검사를 한 뒤, 외할머니가 루이소체 치매라는 진단을 내렸어요. 이름도 낯선 이 루이소체 치매에 걸리면 ‘있지도 않은데 실제 있는 것처럼 보이는’ 환시 증세에 시달려요. 뇌에 나쁜 단백질이 쌓였기 때문이래요. 또 운동 능력이 떨어져서 걸음걸이가 평소 같지 않고 발을 질질 끌면서 걸으세요. 또 밤에 잠을 자다가 소리를 막지르기도 해요. 몇 달 전부터 보이는 할머니의 증세가 바로 이랬거든요.


몸도 마음도 불편한 할머니

오전 9시부터 우진이가 집에 돌아오는 4시까지, 할머니를 주간보호센터에 맡기는 것 말고는 할머니를 돌볼 다른 방법이 없어요. 몸도 마음도 불편한 할머니를 집이 아닌 다른 곳에 맡기려니 엄마도 마음이 많이 아팠나 봐요. 엄마는 할머니를 모시고 집과 가까운 주간보호센터 여러 곳에 직접 가보고 상담도 했어요. 엄마는 아빠와 상의했고, 집 근처 주간보호센터에서 다른 할머니들과 생활하는 게 외할머니한테 더 나을 수도 있겠다고 판단했어요. 그동안 외할머니의 걸음걸이는 더 느려지고, 기억력은 더 떨어지신 것 같았어요. 언제나 유쾌하고 활기차던 할머니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긴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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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할머니의 치매는 훨씬 오래전에 시작했을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오히려 함께 생활하는 가족이 치매 초기에 오는 행동 변화를 일찍 알기 더 어렵기 때문이에요. 왜냐하면 조금씩 변하는 이상 행동에 가족들이 점점 익숙해지거나, ‘나이가 들면 다 저렇지’하고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가기 때문이래요. 사실은 그보다 ‘치매’라는 나쁜 병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가족이 인정하지 않고 회피하려 하기 때문이래요.


주간보호센터의 첫날

우진이 가족의 걱정 속에 할머니가 주간보호센터에 가는 첫날이 왔어요. 갑자기 바뀐 환경에 할머니가 몹시 당황하셨나 봐요. 다른 할머니들이 다가와 말을 걸어도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자리를 지키다 집으로 돌아오셨어요. 그날 저녁, 아무 표정 없이 침대에 누워 계신 할머니를 보자 우진이는 왈칵 눈물이 쏟아졌어요. 우진이는 할머니를 끌어안고 한참이나 울었어요. 할머니는 그런 우진이의 등을 두드리며 달래주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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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나타난 고양이

그날 밤, 온 식구가 곤히 자고 있을 때였어요. 할머니는 서랍장 밑에서 고양이가 스웨터를 다 뜯고 있다며 소리를 지르며 소동을 부리셨어요.


(우진 엄마) “엄마, 고양이가 어디 있다고 자꾸 그래?”

놀란 엄마는 할머니 방으로 달려왔어요. 아마 엄마도 인내력의 한계를 느끼는 것 같아요.


(할머니) “저리 가, 이 망할 놈의 고양이.”


(우진 엄마) “엄마, 진정 좀 해요.”


(우진) “아~ 고양이 예쁘다. 그 스웨터 물어뜯지 마. 우리 할머니가 아끼는 옷이야.”

우진이가 허리를 숙여 서랍장 밑을 들여다보며 말했어요.


(우진) “할머니, 고양이가 스웨터 물어뜯는 거 아니래요. 이제 나갈 거래요.”


(할머니) “그래? 나갈 거래?”

할머니는 그제야 안정을 찾으신 것 같았어요.


다른 가족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이 고양이는 실제로 할머니에게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고양이’ 예요. 치매가 시작되면 함께 생활하는 가족이 치매 환자의 증상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 중요해요. 할머니의 이상행동이 잦아진 뒤로 우진이는 할머니 침대 옆에 매트를 깔고 잡니다. 며칠 전 서랍장 밑에서 나와 어디론가 사라진 고양이가 할머니 꿈에 다시 나타났나 봐요. “이리 와. 어디 가? 여기 앉아. 이거 먹어.” 할머니는 주무시다 말고 팔로 허공을 휘저으며 소리를 지르셨어요. 이럴 때 할머니를 진정시키는 일은 우진이의 몫이에요. 우진이가 토닥토닥 달래면 곧 마음이 진정되곤 하시거든요. 우진이는 진정된 할머니가 다시 주무시는 것을 본 뒤에 잠에 들어요.


다시 집으로

할머니가 주간보호센터에 다닌 지 일주일이 되는 날이었어요. 그날 주간보호센터에 가서는 밖에 고양이가 와 있으니 내보내 달라고 소리를 지르는 소동이 있었어요. 할머니를 진정시킬 수 없었던 주간보호센터에서는 엄마에게 전화했고, 엄마는 할머니를 다시 집으로 모셔와야 했어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게 할머니께는 무척 힘들었나 봐요. 안정을 되찾기 위해 할머니는 집에 며칠 더 계시기로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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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고양이, 순이

학교 수업이 끝나고 우진이는 같이 놀자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왔어요. 할머니는 할머니 눈에만 보이는 흰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고 계셨어요.

(할머니) “나비야, 이거 많이 먹어.”


(우진) “할머니 고양이 이름이 뭐야?”


(할머니) “이름? 없는데.”


(우진) “그러면 이름 지어줄까?


(할머니) “이름? 뭐라고 하지?”


(우진) “순이가 어떨까?”


(할머니) “순이?... 나비야 네 이름을 순이로 하재.” “순이야~, 순이야~… 그래, 순이가 좋겠다. 예쁜 순이… 암놈이니까?”


(우진) “암놈이야?”


(할머니) “그럼, 흰 고양이 암놈이지.”


(우진) “순이가 할머니를 많이 좋아하나 봐. 그러니까 할머니 방에 자주 오지.”


(할머니) “그래, 순이가 나를 많이 좋아하나 봐. 나도 순이가 좋아.”


순이는 우리 집에 사는 고양이가 되었어요. 할머니 눈에만 보이는 고양이인데 말이죠. 3, 4일에 한 번 우리 집에 오던 순이는 거의 매일 할머니 방에 찾아옵니다. 주간보호센터에서 돌아오시는 할머니를 졸졸 따라올 때도 있습니다. 주간보호센터에 가신 할머니를 집에서 기다리기도 합니다. 할머니는 주간보호센터에 갈 때 “순이야! 할머니 올 때까지 집 잘 보고 있어.” 하며 집을 나서곤 합니다.


가장 좋은 치료는 ‘가족의 사랑’

주간보호센터에 다닌 지 한 달이 다 되어 갑니다. 다행히도 할머니는 그곳에 잘 적응하고, 안정을 되찾는 것 같아 다행이에요. 새로 친구가 된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함께 율동도 하고, 센터에서 준비한 프로그램에도 참여하고, 식사도 맛있게 하시면서 말이에요.


루이소체 치매는 일단 병이 생기면 완치되지 않고, 시간이 지날수록 증상이 점점 나빠질 뿐이래요. 그래서 병의 진행 속도를 늦춰서 할머니와 가족들을 덜 힘들게 하는 게 최선이래요. 그러기 위해서는 의사 선생님의 진료와 처방에 따라 꾸준히 약물 치료를 하는 것이 중요하죠. 또 가족들은 할머니가 편안하고 안정된 마음으로 생활하실 수 있도록 따뜻한 이해로 감싸주는 것이 중요해요. 이게 약물치료보다 더 중요하대요. 할머니를 불안하게 하는 말, 행동이나 변화는 정말 안 좋은 일이죠.


매일 규칙적인 운동, 노래, 독서 같은 다양한 활동이 할머니의 건강과 안정에 매우 도움이 되는데, 이건 할머니가 제일 사랑하는 외손녀, 우진이가 곁에서 도와드릴 거예요. 운동이면 운동, 노래면 노래, 그림이면 그림… 사실 우진이는 못 하는 게 없는 아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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