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블랙아웃과 마주치다

06 - 두려움과 술

by 수요일


블랙아웃이라는 단어는 군사적, 통신, 무대에서의 용어 등 다양하게 사용한다. 그중 설명이 쉬운 용어설명으로 '무대에서의 암전 현상" 이 있다. 좀 더 찾아보니, 술을 마시다가 필름이 끊기는 듯한 현상을 의학용어로 '블랙아웃' 이라고도 한단다. 내가 찾고 있던 의미인 것 같다.


블랙아웃 - 술을 마시다가 필름이 끊기는 듯한 현상으로 기억이 나지 않는 것


처음 블랙아웃을 만난 날을 지금까지 나는 잊지 못한다. 그 날은 하루 종일 두려움이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계속 기억을 찾아보려 해도 절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정말 답답하고 두려운 하루였다.


집에서 혼술을 잘하지 않는 나였지만 그 주간은 이래저래 힘든 일이 겹겹이 쌓인 주말이었다.

토요일 저녁, 밖에서 술을 마시기 위하여 머리 감고 화장하는 것도 귀찮은 그런 날이었다. 솔직하게는 사람 만나는 것이 싫었다. 그냥 있기는 뭔가 허전하고, 그래서 거의 처음으로 집에서 혼자 술을 마셨다. 처음에는 맥주캔으로 시작했고 마지막은 와인을 마셨다. 나름 깔끔을 떠는 성격이라서 캔 하나 마시고 쓰레기통에 버리고, 또 캔 하나 마시고 버리고 한다. 속이 비어있던 저녁이라서 그런지 맥주가 벌컥벌컥 잘도 넘어간다. 그러나 금세 배가 불렀고, 선물 받은 와인 생각이 떠올랐다. 몇 년 전 영국 유학시절에 사 온 펌핑식 와인따개도 찾았다. 와인잔은 따로 없어서 마시던 맥주잔에 따라 마셨다. 거기까지는 모두 완벽하게 기억이 난다.


맥주잔이어서 어느 선까지 따라 마셔야 하나 고민했던 생각까지도 기억이 난다. 두 번째, 세 번째 맥주잔까지도 기억한다. 그 사이에 치즈를 가지러 냉장고 문을 열었고, 치즈가 떨어진 것을 알고 '다음 주엔 마켓 가서 치즈를 사다놔야겠구나' 했던 기억도 난다.


눈을 떴다. - 이 시기 오피스텔에 살던 시절이다 - 반듯이 침대 위에 누워있다.

어느 날과 똑같이 잠옷을 갈아입고 누워 있다. 꼼짝 안 하고 그대로 누워서, 눈알만 데굴데굴 돌려본다.


오늘은 일요일이다. 어제 이 곳에서 혼자 술을 마셨다는 기억과 동시에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본다.

깨끗하다. 누군가 술자리를 모두 깨끗하게 정돈했다.

싱크대 위를 본다. 어제 마시던 맥주잔 말고 작은 유리잔, 큰 유리잔이 더 있었고, 깨끗하게 설거지가 되어 있다.

'내가 꺼낸 기억이 없는데, 누가 꺼낸 거지? 설거지를 내가 했어?'

어제 입고 있던 츄리닝은 다른 날과 다름없이 잘 개져서 침대 아래에 놓여 있다.

'내가 습관적으로 했나? 옷 바꿔 입은 기억이 없는데, '

화장실로 간다. 꺼내지 못한 마스크팩이 봉투만 찢어진 채 세면대 위에 있다. 거울을 보니, 얼굴에 눈썹이 사라져 있다. 눈이 좀 부어있다. 얼굴도 씻고 잤나 보다.


현관문을 보았다. 2개의 걸고리까지 걸어두어서 엄마가 와도 번호만 누르고 들어올 수는 없는 상황이다. 분명 아무도 왔다 가지 않았다. 부스스한 머리와 그린 눈썹이 사라진 퉁퉁 부은 얼굴로 침대에 가만히 올라와 앉는다.


맥주잔 딱 반까지 와인을 따라야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한 것까지 기억난다.

아니다 그 후, 와인잔은 정말 건배를 하면 예쁜 종소리가 나던데, 맥주잔은 그런 소리가 왜 나지 않냐며, 몇 개의 맥주잔을 더 꺼내온 것도 기억이 났다. 딱 거기까지만이다.


마시고 놀던 맥주잔들을 설거지 통에 넣고, 설거지를 하고 마시던 술자리를 정리한다. 얼굴을 씻고 - 칫솔질도 했을까? - 그 정신에 마스크팩을 한다고 냉장고에 넣어둔 마스크 팩도 꺼내온다. 얼굴에 붙이지 못한 채 입구만 찢어두었지만 말이다. 멀쩡하게 잠옷을 갈아입고, 츄리닝도 정리하고 침대에 누워 잤다.

불도 껐다.


내가 모두 직접 한 일인데, 거짓말처럼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 집안 여기저기가 갑자기 낯설게 느껴진다. 의학 용어설명처럼 필름이 끊긴 듯한 현상, 바로 그런 현상 기분이다. 온몸에 기운이 모두 빠져나간 것처럼 아무 힘도 없다. 내 생에 처음 블랙아웃을 만난 날이다. 지금까지 잊을 수 없는 10월의 일요일 하루다.


하루 종일 술, 아니 술을 마신 나를 두려워했다.

계속 기억을 찾아보려 더듬어 보아도 머리만 아프고 절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답답함이 한동안 술을 살짝 멀리하게 했다. 물론 술을 끊게까지는 하지 못했다.


블랙아웃, 살면서 단 1초라도 너 마주치고 싶지 않아! 알았지?



[술의 독백]

처음이다.
오늘은 Y 혼자 나를 만났다.
시원하게 맥주캔을 마시고, 교양 있게 와인을 마셨다.
와인잔 예쁜 종소리가 나지 않는다며, 투덜 되는 것도 귀엽다.

슬그머니 그녀 찐 속마음이 알고 싶어 졌다.
난 사람들의 속마음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물론 아주 살짝 그녀 뇌 전파를 끊어야 하지만, 생명에 해롭진 않다.

텔레비전 브라운관이 갑자기 어두워지듯이 그녀 주위가 깜빡한다.

Y가 혼자 펑펑 운다.
저렇게 우는 건 처음 본다.
왜 우는지 찐 속마음을 물어보기도 전에 바로 전파를 이어버렸다.
겉모습과 너무 다른 그녀의 모습에 나는 당황했었다.

Y는 보통 때와 똑같이 잠자리에 들었다.
Y는 뇌 전파를 끊었던 그 이후부터 잠들기전까지 그녀의 행동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 이후 더 이상 나의 능력을 사용할 수 없었다.
Y는 자신의 찐 속마음을 내가 알 수 있도록 단, 1초의 틈도 보이지 않는다.

그 날 Y는 왜 그렇게 서글프게 울었을까?

지금까지도 나는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