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취함을 알리지 말라!

05 - 직장생활과 술

by 수요일

2000년 초반, IT사업이 성장하고 있는 산업 시장의 한 파트였던 온라인 교육 회사에서 직장생활은 시작되었다. 의류학과를 공부하고 패션산업으로 첫발을 내밀었지만, 운명의 길은 선택권 없이 20년간 일하도록 결정된 온라인 교육 회사로 나를 이끌었다.


여기서 주제와 다르게 샛길로 좀 빠져본다.

나는 인간의 운명은 신들이 완벽하게 만든 지도를 따라 걸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들이 만든 인생지도 위에는 내가 경험해야 하는 수백 개의 단계별 장소들이 이미 점찍어져 있다. 이 곳을 절대로 지나치거나 돌아서 다른 장소로 갈 수는 없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아주 조금 늦게, 아주 조금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

인간이 하늘나라로 가는 시간을 제외하고, 그 장소와 시간 속에 얼마나 머물지는 최대한 인간의 의지와 결정을 허락해준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힘들 때마다 차라리 이 시간까지도 신이 모두 결정해두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했다. 횡단보도의 신호등처럼 빨간불이 켜지면 서고, 녹색불이 켜지면 건너가듯이 말이다.


트렌드에 따라 패션 IT 회사에서 흘러 흘러 - 결국은 신이 만들어놓은 인생지도에 따라 - 온라인 교육 회사에 입사했던 첫날이 가물가물 기억난다. 2002년 4월의 봄이었다.


온라인 사이트에서 상품을 오픈하는 PM 업무를 하고 있는 내 직업군은 거의 주 6일 야근이 일상이었다. 그 시절은 주 5일 근무가 아닌 시절이었다는 것이 새삼스럽다. 언제나 자정을 넘어 오픈을 하면, 함께 한 동료들과 늘 술자리로 마무리를 했다. 언성을 높여서 미안하다며 사죄의 의미로 한 잔, 도대체 우린 퇴근이 매일 새벽이라며 또 첫차 퇴근 고민이라고 한 잔, 상품이 잘 오픈되어서 모두 수고했다고 파이팅 한 잔...

이유 없는 무덤은 없다는 옛말처럼 우리에게는 이유 없는 한잔은 한잔도 없었다.


" 이번에 기획을 중간에 계속 변경해서 힘들었어요." 개발자 A 가 한잔을 따르며 말한다.
" 상품기획이 계속 변경돼서 저도 어쩔 수가 없었어요.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
오늘은 Y가 의식적으로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빼고 답한다.

옆 다른 동료 개발자 B가 한마디 또 거든다.
" 다음부터는 기획 변경하면 오픈일도 변경해야만 해. 이번처럼은 다신 안 할 거야 "
처음 듣는 대화 소재는 아니다. 언제나 오픈을 하고 나면 나오는 불만 가득한 술안주 대화다.
Y는 언제나 이 불만 투성의 대화 소재에 기분이 좋지 않다.

그 날은 몇 번을 참다 참다 Y가 한마디 한다.
" 똑같이 회사에서 돈 받고 일하는 사람들인데 왜 나만 항상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내 회사에서 내가 시키는 일도 아니잖아요 "
갑작스러운 Y의 높은 말투에 술을 마시던 동료들이 모두 그녀를 쳐다본다.
" 와. Y도 술 취하는군요. 이번엔 4일 정도 밤샜죠. 오늘은 빨리 들어가서 쉬세요. " 원하던 답이 아니다.

Y는 전혀 취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피곤해서 적당하게 속도를 맞춰가며 마시고 있었다.

오픈을 하고 나면 매번 "미안합니다.", "다음부터는 꼭 일정을 넉넉하게 하겠습니다."의 고개 숙이는 문장들을 반드시 말해야만 한다는 것이 억울해서 한 말이었다. 그런데, 동료들은 피곤해서 술 취한 김에 불평을 한다며 수군거린다.

Y는 더 이상 아무 말하지 않았다.
앞에 놓인 술 한잔을 따라 그대로 마셨다.


그 날 그렇게 마셨던 한잔이 지금도 기억난다.

나는 진정으로 취하지 않았는데, 왜 모두들 나를 취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었을까?

술자리라는 곳은 대부분 모든 행동과 말을 <취함>이라는 단어로 싸잡어버린다는 것을 그때부터 느꼈던 것 같다. 직장생활에서의 술자리에서는 언제나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긴장을 놓지 않아야 한다고 결심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이순신 장군님이 노량대첩에서 전쟁이 한창으로 치닫고 있을 때, 일본군의 총을 맞아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전쟁의 승리를 위해 "내 죽음을 적들에게 알리지 말라"라는 말씀이 떠오른 건 왜였을까?

이 명언을 그대로 받들어, 직장생활 회식, 업체 미팅 술자리 등은 전쟁터에 나가는 자세로 임하였다. 마지막 술자리가 파하여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그 순간까지 "나의 취함을 알리지 말라"라고 머릿속으로 계속 외쳐본다. 아무도 나를 취했다고 생각하지 못하도록 하는 나의 대전략은 대부분 성공했던 것 같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장군님처럼 장렬하게 침대에 전사를 한다.



[술의 독백]

Y가 왔다. 그녀의 기분이 별론인 듯 보인다.
대학교 시절보다 Y는 술잔이 많이 늘었다.
반면에 대학교 시절보다 알코올 분해 능력은 줄어들었다.

대부분 직장인은 대학생보다 나이도 많아지고,
무엇보다도 스트레스가 높아져서 나에 대한 분해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그런데 인간들은 느끼지 못하고, 술잔만 계속 늘려 간다.

Y가 나를 보며 속삭이기 시작한다. "나의 취함을 알리지 말라"
앗~ 이미 그녀의 분해능력이 한계점에 다다랐다는 조짐이다.
조금 있으면 벌떡 일어나 전쟁터의 장군처럼 " 적들에게 나의 취함을 알리지 말라"라고 외칠 텐데!

다행히 한계선을 넘기 전 그녀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출발한다.
그녀가 집에 잘 도착해서 참 다행이다. 한숨을 내려놓았다.

뭔가 반짝거린다.
Y 집 문구멍에 그녀의 열쇠가 그대로 꽂혀있다.
Y의 "취함을 알리지 말라"는 전략은 성공했지만, 꽂혀있는 저 열쇠는 패배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