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 쓴 맛, 술맛은 쓰다.
지금 누군가가 길을 가로막고 "세상에서 제일 좋은 시절은?" 하고 물어본다면, 1초의 생각도 없이 " 대학 때요"라고 답할 것이다.
"그때가 가장 좋다고 말한 최고의 이유는? 하고 또 묻는다면,
"그 시절이 좋은 이유는 정말 많지만, 그중 가장 좋은 최고의 이유를 들라고 하면, 음, 그때는 술맛이 쓰지 않았어요. 그때는 술이 쓰다는 생각도 안 했던 것 같아요"라고 속삭이듯 답하고 싶다.
그 좋았던 대학 생활이 막을 내리고, 직장생활이라는 사회의 조직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학 졸업과 함께 취직을 하였지만 중간에 대학원 생활도 하고, 2년간의 유학생활도 다녀왔다. 뭔가 더 하면 좀 더 나은 미래가 보일 것이라는 착각 반, 현실을 조금이라도 늦게 받아들이고자 하는 두려움 반의 산출물들인 샘이다. 멀리도 가보고 늦게도 달려보았지만, 결국은 돌아와 2002년 사회생활 어떤 술자리에 앉아있는 나를 마주 한다.
한 햄버거 업체의 광고 속 "니들이 게맛을 알아" 카피가 유명할 때였나 보다.
사장님이 술을 마시다가 " 니들이 술맛을 아느냐?" 하고 물었다. 직원들 대부분이 취기가 올라있었다. 정말 못 들은 사람도 있고, 듣고도 그냥 지나쳐버린 분들도 있다. 알코올에 강한 나에겐 정확하게 들려왔다. " 니들이 술맛을 아느냐? " 분위기상 답을 원하는 것 같지 않았지만, 그 시절 막내의 의무감에 사로잡힌 나는 뜻밖에 다시 질문을 던졌다. " 그럼 사장님은 술맛을 아세요? "
다행히도 시끄러운 주위 속에, 내 질문은 사장님의 귓등을 지나쳐버리는 것 같았다.
높은 상사에게 굳이 묻지 않아도 될 질문을 했다 싶어 후회를 하고 있을 때, 사장님이 나를 보며 답을 하신다.
" 쓴 맛. 술맛은 쓰다."
지금은 하늘에 계신 첫 직장 사장님의 그 목소리가 20년 사회생활을 하면서 가끔 떠오른다.
그런 날은 회식 때 팀원들에게 " 너희는 술맛을 아느냐? " 고 내가 질문을 하고 있다. 혹시나 "쓴 맛이요"라고 답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과 그때는 묻지 못했지만 오늘은 쓴 이유를 물어봐야지 하는 다짐을 하면서 질문을 하고 있다. 솔직하게 이제야 고백하면, " 쓴 맛이요"라는 답을 누군가가 할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늘 누구도 듣지 못할 만큼 작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그 날 사장님의 질문에 "쓴 맛이요"라고 말하지 않고 - 물론, 알지도 못했으니 답을 할리는 없었지만 - 질문을 한 것은 잘한 일인 것 같다. 그 누구도 " 쓴 맛이요"라고 답 해주시 않기를 사장님도 원하지 않았을까?
내가 처음 "술맛이 써"라고 말한 것은 술 종류에 따라서였다. 화학약품 향이 나는 화학주, 즉 소주를 마시면서 언제부터인지 "술맛이 쓰다" 고 말했다. 과일향, 커피 향, 초콜릿 맛까지 도는 수제 맥주를 마시면서는 그 맛이 쓰다고 말한 적은 없다. 백주는 개인적으로 동동구리무 향이 나서 술이 아니고 향수를 마시는 맛이었고, 와인은 단 맛이거나 산도와 타닌이 별 3개 이상 있는 와인이라면 씁쓸한 맛을 느꼈다. 그리고 서양술 양주를 마시면서 다시 "술맛이 써"라고 말했던 것 같다.
시간이 흘러, 사회생활을 10년 하고 더하여 3년쯤 했을 때였을까? 아니면 더 3년을 또 했을 때부터였을까?
술 종류에 따른 쓴맛이 아닌 정말 쓴 술맛을 알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다 라고 꼭 짚어 말할 수는 없다. 또 내가 생각하는 쓴 맛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도 말할 수가 없다.
생약초를 입에 넣고 씹어먹은 맛보다 더 쓰다고 해야 하는지, 콧물감기약 가루를 멋모르고 입에 넣었을 때의 그 쓴맛보다는 덜 쓰다고 해야 하는 건지, 세상에는 내가 느낀 술의 쓴맛을 비교해줄 기준이 없다는 것이 불만스럽다. 그 날 사장님이 말했던 그 쓴 술맛은 도대체 얼마나 쓴 맛이었는지를 평생 알 수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쉽다.
이제 나는 술 종류에 따른 쓴 맛이 아니라, 과일향 풍부한 수제 맥주를 마셔도 술맛이 쓴 날이 있다.
그런 지금의 나에게 누군가가 사장님처럼 "너는 술맛을 아느냐?" 하고 물어본다면, 그냥 못 들은 척하고 싶다. 그런데도 또 "너는 술맛을 아느냐" 하고 계속 묻는다면, 이번에도 나는 2002년 그 술자리처럼 " 그럼 너희들은 술맛을 아느냐? "라고 질문하련다.
[술의 독백]
2002년 00 회사 회식 날이었어.
지위가 꽤나 높은 분 인 것 같았어. [사장님]이라고 그를 부르더라.
아주 낮은 목소리로 술잔에 담긴 나를 빤히 보더니 " 니들이 술맛을 알아?" 하더라.
당연히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보는 거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나만 바로 보고 있더라고.
헉. 나한테 물어보고 있는 거였어
술한테 술맛을 아냐고 질문을 받는 건 처음이었어.
나한테 나를 아냐고 물어보는 거잖아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을 하고 있는데, 너의 목소리가 들렸어.
" 그럼 사장님은 술맛을 아세요? "
나를 바라보던 사장님은 나에게만 보이는 엷은 미소를 지으셨어.
그리고 " 쓴 맛. 술맛은 쓰다."라고 답을 하셨어.
얼마나 흘렀을까..
그분 옆에는 아무도 없고, 너도 다른 무리에 섞여 있더라.
그때 그분이 나를 보면서 중얼거리셨어.
" 정말 고맙다. 오늘 같은 날 나한테 술맛을 아냐고 물어봐줘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