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 술과의 비밀
멀쩡한 정신으로 마시기 시작한 술은 잠깐 한눈을 팔거나 순간 긴장을 놓치면, 첫 번째 정신줄 하나를 '팅' 하고 풀어버린다. 처음 한 줄 풀린 특징은 스스로 아직은 취하지 않았다고, 멀쩡하다고 주위에 계속 말을 건다. 물론 행동은 멀쩡하고, 걸음걸이도 일직선이다. 조금 달라짐을 찾자면, 말이 많아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주위 모두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발음으로,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속마음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이때를 가장 조심해야 한다. 첫 번째 정신줄이 끊어지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리지만, 그다음 두 번째, 세 번째 줄들은 도미노 현상처럼 한 번에 끊어진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한다. '팅, 팅, 팅, 팅, 팅 ~~~ '
직장생활의 해가 지나갈수록 알코올 분해 DNA가 강한 나도 첫 번째 정신줄이 풀어지는 시간이 점점 짧아져 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시점이 온다는 것을 정확하게 느끼는 촉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거다. 그 촉이 발동하면 머리 뒤 어디에서 '여기서 계속 마시면 정신줄이 금방 다 풀어질 거야! 천천히 마셔! 천천히 '라고 알려준다.
소리가 들려오면 들고 있던 술잔을 더 이상 마시지 않고 앞에 내려놓는다. 그리고 남들은 들을 수 없는 방법으로 술잔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을 걸기 시작한다.
이 습관은 언제부터인가 머리 뒤에서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나의 술자리 루틴이 되어버렸다.
술을 마시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가면, 어느새 내 앞의 술잔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가끔 빈 술잔을 이렇게 보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앞사람이 "어이쿠 술이 떨어진 걸 몰랐네! " 하면서 빈 술잔에 술을 채워주는 결과를 종종 가져오기도 한다. 술이 있어도 마시지 않고, 계속 술잔만 바라보고 있던 내 모습을 술을 따라준 그 사람은 눈치챘을까?
3년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짧을지 정말 몰랐어.
우 씨, 이럴 줄 알았으면 한 5년 이렇게 계약할 걸 그랬나 봐
아니다. 더 길게!
다음 달엔 결정을 해야 하는데...
이건 너한테만 말하는 거야!
두렵긴 하다. 혹시 재계약이 안되면 어떡하냐...
입 밖으로는 절대 말하면 안 될 것 같아.
부정 탄다 말이야.
되겠지? 될 거야! 돼야 하는데..
사업부를 할 때의 지나간 추억이다. 정말 중요한 재계약이었다.
입 밖으로 " 계약이 안될 것 같아"라는 말을 꺼내면, 부정을 타서 결과가 정말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겁이 났다. 미신을 믿진 않았지만, 그때는 그런 부분까지도 조심하면서 계약 성공 동아줄을 잡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 재계약을 위해 10개월을 준비했다. 10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나는 이 불안함과 두려움을 내 앞에 놓인 술잔에게 줄곧 말했다.
'이건 너한테만 말하는 거야! '
라는 말을 시작으로.
오늘 미팅은 분위기가 별로 였어.
다음 미팅엔 뭘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모르겠다.
휴 ~
너한테만 말하는 거니깐 그냥 알고 있어
너한테만 말하는 거야.
오늘 전화는 어느 정도 긍정적이었어.
그래도 계약은 도장 찍기 전엔 모르다니깐 조심해야겠지.
이렇게 3개월 더 버텨야 해.
잠이 안 온다.
이건 너한테만 말하는 건데
내일이야. 내일 도장 찍어 보낸다고 했어.
그럼 정말 된 거 아닐까?
지난번처럼 또 변경하면 어떡하지?
신은 나의 48년 인생지도 위에 따뜻한 봄날도 많이 만들어 주었지만, 갑자기 강한 소나기를 내려주거나 몸이 날아갈 듯한 강한 폭풍을 만들어 보내기도 한다.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하지 못하여 물에 빠진 생쥐가 된 적도 있고, 아등바등 어떻게든 버텨서 바람에 날아가지는 않았지만 여기저기 몸과 마음이 뜯긴 날도 있다.
그런 날일 수록 상처 받은 모습들을 더 속으로 꽁꽁 숨기고, 겉으로 표현하지 않게 된다. 나만이 느끼는 불안함과 두려움을 타인에게 절대로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때마다 독백처럼 수십 번, 수백 번 술에게 말을 건다.
'이건 너한테만 말하는 거야! '
라는 말을 시작으로.
술잔 속 술은 내 말이 끝날 때까지 처음 모습 그대로 나를 보고 있다. 내가 말을 시작한 그 순간 모습으로 끝까지 듣고 있다. 찰나의 움직임도 없이 그대로 들어주고만 있다.
오늘은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술 한잔을 술잔에 가득 채워서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말짱한 정신으로 말한다. 오늘은 무엇인가를 숨기고 싶은 것이 있는 날도 아니고, 불안하거나 두려움도 없다. 그가 어떻게 생각할지, 진심으로 궁금한 질문이 있다.
이건 너한테만 말하는 거야!
요즘은 모든 일에 긍정적이고,
별거 아닌 행동에 막 웃고,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반드시 순서대로 하지 않아도 화 안 내고,
헝클어진 책꽂이를 봐도 그뿐이다.
나 정말 변한 것 같아.
나 잘 살고 있는 거 맞겠지?
[술의 독백]
오랜만에 Y가 말을 걸어준다.
이상하다.
그녀의 입에서 술냄새가 전혀 없다.
" 이건 너한테만 말하는 거야!
요즘 나 모든 일에 긍정적이고, 별거 아닌 행동에 막 웃고,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반드시 순서대로 하지 않아도 화 안 내고,
헝클어진 책꽂이를 봐도 그뿐이다.
나 정말 변한 것 같아.
나 잘살고 있는 거 맞겠지? "
Y가 수십 번, 수백 번
" 이건 너한테만 말하는 거야!"
하고 그 동안 말을 걸어올 때마다
나의 역할은
움직임 없이 그저 듣고만 있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다.
" Y, 축하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