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맛이 왜 이래?

08 - 퇴사자의 술맛

by 수요일


20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니던 직장생활을 [사직서] 한 장으로 마무리했다. <시원섭섭하다>는 문장의 의미를 진심으로 알고 싶다면, 이렇게 퇴사를 하면 되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이직을 위한 퇴사가 아녔기에 더욱 마지막 회사 카페 커피 한 잔을 느리게 느리게 마셔본다. 주차장을 나올 때에는 못 보던 햇살 한 자락도 본 것 같다. 바보다. 시간이 늦은 7시가 넘었는데, 햇살이라니!


퇴사 후 생활은 많은 것들이 변화한다. 처음은 조금 낯설다. 그러나 이내 잘 적응하게 된다. 사람이란 존재가 원래 편하고 쉬운 쪽으로 적응을 하게 되어 있음을 스스로 몸소 경험한다. 한편으로는 너무나도 시간이 많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간의 많고 적음조차 계산할 수가 없다


그 많은 변화 중에 [술]의 변화에 대하여 써보려고 한다. 월요일은 주간회의에 지쳐서, 화요일은 미팅 후 목이 너무 말라서, 수요일은 중간까지 잘 왔으니, 목요일은 지치고 지쳐서, 금요일은 즐금이니깐... 그 많고 많은 이유로 함께 했던 술자리의 술에 대해서!


내일 출근을 걱정하고, 미팅을 고려해야 하는 그 시기에서 이젠 벗어났다.

술을 먹고 와서 늦잠을 자도 되고, 술자리에서 중요한 계약 건 미팅 같은 건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다.

모든 개인적인 일정은 내 의지에 의해서 정해지고, 내 의지에 의해서 변동도 가능한 때인 것이다.

' 저녁 약속 잡히기만 해 봐라.'

' 세상 가장 자유롭게 마셔보리라.'

' 내일 오전 미팅이에요, 내일 중요한 보고서 발표예요, 내일 출근 일찍 해야 해요 등 이런 마인드는 개나 줘버리자. 후후 '


직장 생활하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계속 밀어두었던 모임과 매번 내가 취소 했던 지인들의 약속을 직접 잡았다. 이제 나는 <시간 부자> 라며, 이번엔 절대 펑크내지 않겠다고 당당하게 말하며 약속을 잡았다.


그렇게 저녁 약속들이 계획되었고, 일정에 맞춰서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 고마운 사람들을 만났다.

고기 굽는 집, 횟집, 퓨전 음식집, 중국집 등 모두 술이 함께 하는 저녁 장소들이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사람들과의 저녁 시간은 다시 생각해도 행복한 시간이었다. 고기, 회, 탕 등 그들과 함께 한 장소의 음식들은 모두 별 5점을 줄만하다.


문제는 그놈, 술이다.

벌컥벌컥 들이켜 마셨던 그 시원한 일차적 맛이 없다. 목젖을 넘어가는 그 짜릿한 맛도 없다. 가장 중요한 한 잔 한 잔 마심에 따른 취함이 주는 그 맛이 사라졌다.

벌컥벌컥 마시니 배가 부르다. 술보다 맛난 음식 안주의 목 넘김이 더 많다. 이 자리는 취함의 맛을 가져올만한 스트레스가 없다 보니, 그 누구도 " 마셔. 그냥 마셔"라고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 술맛이 왜 이래? "


나도 모르게 큰소리를 내버렸다. 모두가 쳐다본다. "술맛이 왜?" 하고 묻는다.

"내 건 이상하지 않은데, 네 거 줘봐", "이상해? 난 괜찮은데. " 자신들의 술잔을 한 모금씩 마시며 우리 자리의 술맛이 이상하지 않음을 친절하게 알려준다.


멀쩡하게 집으로 돌아와서, 냉장고에 들어있는 맥주캔을 하나 땄다.

한 모금 들이킨다. 맥주 맛이 쓰다. 역시 다르다. 그 예전 마셨던 맥주도 썼다. 그러나 쓴맛 뒤에 넘어오는 시원함이 하루의 피로를 사라지게 해 주었다. 그 사라짐의 느낌에 벌컥벌컥 마셨다. 지금은 아니다. 그냥 쓰다. 아무것도 내 몸에서 사라지는 시원함이 없다.


많이 안 마셔서 그런가, 한 캔을 더 따서 마실까 하다가, 내 불러진 배가 눈에 보인다. 이미 꽉 찼다. 예전 술자리에서 거의 안주를 먹지 않았다. 술자리에서 배가 불러 본 적이 없다는 것이 기억난다. 오늘은 안주로 배를 채웠다. 젓가락으로 안주를 계속 주워 먹고 있던 내 모습이 떠올려졌다.


신이 이미 완벽하게 만들어놓은 내 인생지도 어딘가에 지금은 사라진 이 술맛들을 맛보게 해 놓았을 것이다. 그래서 살다 보면 직장 생활하면서 맛 본 술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신이시여! 실수로 놓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죠?

제 인생지도 위에 지금 <이 시점>을 찍어놓은 순간, 다신 그 맛을 볼 수 없다는 실수를 하신 것을 알고 계시죠?


마지막 날 주차장을 나올 때 본듯한 햇살 한 자락이, 신이 자신의 실수를 알아챈 표현이었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눈치채고 있다.


[술의 독백]

Y가 갑자기 " 술맛이 왜 이래? 하고 큰소리를 낸다.

함께 한 모든 사람이 내가 상하지 않았고, 이상하지 않다는 나의 결백함을 입증해주었다.
너무나도 고맙고 좋은 사람들이다. Y 빼고!

Y가 "술맛이 왜 이래? 하고 큰소리를 내려고 할 때, 나도 사실 할 말이 많았다.

" Y, 술을 왜 이 모양으로 마셔? "
" Y, 도대체 안주를 왜 이렇게 많이 먹어?"
" Y, 내가 좋은 거야? 안주가 더 좋은 거야? "
" Y, 그 많던 스트레스는 어디 두고 온 거야?"
" Y, 오늘 취하고 싶어서 술을 마시는 거 맞아? " 등등

달라지고 변한 건 내가 아니고 Y 너라고 나도 큰소리로 말하고 싶다.

" 변한 건 내가 아니고 너야.
똑바로 알아둬 "

오늘 정말 취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