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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담요 Jul 14. 2019

詩의 공간으로 놀러 오세요.

시가 나에게로 온 이야기.

  내가 처음으로 시가 흐르는 공간에 머물렀던 것은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일주일에 한 번, 백일장 코너가 있었는데 시인이 게스트로 출연하여 청취자가 보내준 작품들을 낭독하고 그것에 대한 감상평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10시 이후의 나의 방은 매우 고요했고 온전히 나 혼자 뿐이었다. 잔잔한 배경음악이 깔리면서 몰입도가 높아지고 (지금의 내 기억으로는) 경상도 어조가 짙게 배어 있는 나이가 지긋한 여성 시인의 목소리에 온 감각들을 집중하게 되었다. 청취자의 시를 다 읽고 배경음악까지 사라지면 라디오 디제이와 시인은 모두 방금 낭독한 작품이 얼마나 대단한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에 대해서 진심을 다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시절의 나는, 어떤 무명의, 어쩌면 나처럼 엎드려서 라디오를 몇 시간 동안 듣고 있을 누군가가 써 보낸 글을 두 어른들이 그렇게 정성껏 읽어 주고 공감해주는 상황이 무척이나 부러웠다. 나에게 있어서 시는 그렇게 모호하고 묘한 무엇인가를 정성스럽게 들어주고 나누어주는 사람이 있는 따뜻한 마당이었다. 


  학창 시절의 문학 시간은 그저 수학공식을 외우는 시간과 다를 바 없었다. 시각과 청각이 만나면 공감각적 심상, ‘A는 B이다.’라고 표현하면 은유, ‘A 같은 B’ 또는 ‘A처럼 B’라고 표현하면 직유, 시의 시대적 배경, 시어의 의미 같은 지식들을 섭취하고 그것을 외우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매우 명확하고 소설이나 논설보다 공부하기 쉬운 장르였다. 그렇게 메마른 문학 시간에도 이육사의 <청포도>나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 자아내는 정서는 한동안 나를 멍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때 어렴풋이 느낀 시는, 고통 속에서도 아름답게 존재할 수 있도록 해 주고 아름다움을 통해서 고통을 대변해주는 존재였다.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 <내가 경험한 갑작스럽고도 이상한 감정>으로 그림을 그려 보았다. 

  내가 시에 본격적으로 열광하게 된 계기는 시가 나의 마음을 일깨워준 경험을 하고 나서부터였던 것 같다. 강의 시간에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의 <내가 경험한 갑작스럽고도 이상한 감정(Strange Fits of Passion Have I Known)>을 처음 만났을 때, 길고 긴 낭만주의 시들의 미로에 빠져 꾸벅꾸벅 졸고 있던 따뜻한 봄날, 이 시의 마지막 연에서 나는 남모르게 가졌던, 그래서 나 자신도 한 번도 깨닫지 못했던 감정과 사고의 패턴을 발견하여 온몸에 전류가 통하는 것 같은 기분 좋은 섬뜩함을 느끼며 몽롱한 잠에서 깨어났다. 사랑하는 루시가 사는 오두막집을 향하여 말을 타고 가고 있던 화자가 지붕 위에 떠 있는 저녁달을 줄곧 응시하다가 그 달이 지붕 너머로 떨어지자 ‘루시가 죽었으면 어쩌지!’하는 부질없는 생각이 흘러들어왔다는 시였다. 이 터무니없는 순간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음악 속에서 여러 악기가 하나, 둘, 모여들면서 절정으로 이르고 조용히 끝나듯, 말발굽 소리와 달이 가까워지는 진행을 통해서 나에게로 전해져 왔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알겠지만 소중한 대상을 향해서는 애정 만큼의 불안감이 존재해서 가끔씩 그 사람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하면 가슴을 쓸어내리며 사랑하는 사람의 안녕을 확인하고 싶을 때가 있다. 이때부터 시는 나의 모호하고 답답한 마음을 그 누구보다 더 날카롭고 명확하게 짚어내어 어쩔 줄 몰랐던 나의 마음에 숨구멍을 뚫어주는, 내면의 소화제가 되었다. 


  울지 못할 때는 시를 읽으며 울고, 나의 모순되고 못난 모습을 발견하여 자괴감에 빠져 있을 때에도 시 속에서 등장하는 치열하고도 비일상적이며 모난 마음들과 연대를 이루며 따뜻한 위로를 받고 적나라한 성찰을 하기도 한다. 어디에 가서도 시를 찬미하는, 일상 속에서 그리 달갑게 여겨지지 않는 버릇을 가지고 있는 나는 시에 가까이 다가가기가 어렵다고 하는 주변의 말들을 종종 듣는다. 시를 읽으면 어딘가 모호하고 확실하지 않아서 무슨 의도를 전달하려고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그들의 말에 동의한다. 그러나 나는 그 모호함 속에 숨어 있는 나의 자리를 사랑한다. 주어가 어디에 있는지, 목적어가 어디에 있는지, 행이 갈라진 어구가 어떤 부분을 꾸미고 있는 것인지에 따라 달라지는 의미의 변화, 그리고 그 간극 사이에는 내가 그 시를 해석하고 그 시가 자아내고 있는 정서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나는 그 빈 공간에서 시인이 나에게 보낸 사람과, 나 자신과, 시를 읽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나만 옳다는 고집도, 내가 틀렸다는 실망감도 그곳에서는 모두 가볍게 흩어진다. 그 안에서 나는, 과거와 미래에 얽매이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괜찮은 사람이다. 무명 씨의 소소한 언어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있는 마당으로, 고통과 아름다움의 결합물로, 나의 답답함을 시원하게 내려보내 주는 소화제로, 무엇이라도 괜찮은 빈 공간으로, 그렇게 시는 내게로 왔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시가 마련해 놓은 텅 빈 공간으로 자주 흘러 들어왔으면 좋겠다. 그러지 않아도 시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놀러 갈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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