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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yeon Jan 26. 2018

월경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달거리 수다회>와 나의 월경

항상 몸에 대한 이야기를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다. 나에게 그것이 중요한 이야기였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아마도 이 이야기가 중요하다고 느끼는 다른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월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사람들을 모집했고, 이에 응답한 네 명의 사람들과 월경에 대해서 일곱 주에 걸쳐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도 이 주제로 무엇을 해 본 것은 처음이라, 대화 주제가 없으면 어떡하나 내심 매주 걱정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매주 수다는 세 시간을 넘겨 끝나곤 했다. 월경 이야기만 한 것은 아니다. 월경에서 시작해서 몸, 성에 대한 고정관념, 교육환경, 대중문화에까지 이야기가 자유롭게 오갔다. 이제 월경에 대해 내가 이번에 마련한 대화의 시간은 여덟 번째 시간인 한 번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집에 돌아와 지난 해 7월에 썼던 일기를 다시 보았다. ‘월경’을 매개로 한 여성억압에 대한 문제의식이 충만해 있던 시절이었다. 그런 나에게 <월경의 정치학>이라는 책의 출간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그런데 책을 읽다 보니 오히려 책 안의 지식 안에 매몰된 걸까? 아니면 작년 여름의 저 일기가 취중일기라서 그런 걸까. (술이 나의 기억을 일깨운?) 작년의 나는 나의 경험에 대해 지금보다 더 생생하게 많이 기억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나에 대해 나는 단 몇 개월 만에 그만큼 잊은 것일까? 아니면 요즈음은 다른 사람들의 경험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어서일까.


오늘 승리에게 했던 질문. ‘너의 첫 몽정은 어땠어?’라는 질문을 나는 그때도 했다. 남자의 몽정은 여자의 초경과 함께 성인이 되는 첫 경험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몽정은 성욕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러고 보면 남자의 몽정이 여자의 초경과 비교된다는 것은 남성만이 욕망의 주체로 여기는 인식과 관련이 있다. 여자들도 섹스와 관련된 꿈을 꾸지만 그 경험은 말해지지 않는다.


작년의 나도 또한 ‘나는 초경을 하고 무엇이 달라졌을까’를 생각했다. 

나는 이렇게 적었다.


나는 초경을 하고 무엇이 달라졌을까. 하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초경 이전과 이후의 삶은 너무나도 달라서 굳이 생각으로 정리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우울했다. 삶이 이런 것이라면 어떻게 평생을 견뎌야 하나, 여자로 태어난 것은 치명적인 저주가 아닐까.


취중의 허세가 약간 들어가 있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나는 정말 그렇게 느꼈다. 어떻게 평생 이 짓을 하면서 살아가나. 그런데 그 감정의 실체에 대해서 더 깊게 성찰할 수는 없었다. <월경의 정치학>을 읽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또 책을 읽으면서 왜 내가 월경에 대해 부정적으로 느끼게 되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왜 수치스럽다고 느꼈을까. ‘너도 이제 여자가 된 거야’ ‘너도 어른이 된 거야’라는 말이 어린 나를 우울하게 했던 실체에 가까운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주변 친구들에 비해 비교적 이른 나이에 초경을 했고, 그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책을 읽으면서, 우리 모임 참여자들의 이야기, 그들이 인터뷰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우리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월경을 좀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사람들은 주변에 손위 여자들이 많은 환경이거나 월경에 대해 주변 여자들로부터 듣고 어느 정도 충분한 정보를 갖고 있었던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너무 일찍 월경을 시작했고, 주변 친구들에게도 나의 월경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친했던 친구가 여자들이 하는 피 흘리는 일에 대해 ‘똥꼬에서 피가 나온대’ 하고 나에게 말했던 적이 있었다. 내가 쭈뼛대며 그게 아니라고, 나도 사실은 그것을 하고 있다고 말했었던가, 말했다가 내 친구가 너무 놀라니까 그냥 거짓말이라고 얼버무렸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렇다고 나는 우리 엄마를 원망하지 않는다. 작년 여름쯤엔 내가 엄마를 조금은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엄마에게도 나의 초경은 너무 급작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우리 엄마로서는 내가 어른이, 여자가 되었다고 축하해 주는 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월경이 금기시될 일이 아니고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성장하며 깨달은 사람이었지만, 엄마가 교육받고 자라 온 환경은 월경과 그것이 배출되는 여성의 몸에 대한 온갖 가부장적인 의미들이 당연시되는 세상이었다. 월경에 대해 엄마와 대화를 나눈다는 생각을 한 나 자신이 얼마나 기특하게 여겨지는지.


그리고 월경에 대해 이야기했을 뿐인데, 엄마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가 왠지 조금 더 가깝게 느껴진다. 엄마의 할머니의 할머니 때부터, 그 할머니의 할머니 때부터 나에게로 이어져 온 무언가, 그것은 무엇일까. 삭제되고 빼앗긴 여성들의 역사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되었다.


무엇보다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질에서 피 흘리는 같으면서도 다른 수많은 경험들 속에서 어린 시절의 나를 혼자가 아니라고 위로해 줄 수 있었다. 나의 경험을 객관화하고 맥락화할 수 있었고, 그것에 있어 엄마와의 대화는 특히 큰 의미가 있었다. 신기하게도, 어린 시절 나의 수치스러웠던 초경에 대한 느낌을 자꾸 이야기할수록 그 기억이 주는 무게감은 옅어졌다. 이야기는 상처를 치유하고, 사람은 이야기를 통해 계속해서 살아갈 힘을 얻는다. 나는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이야기의 집을 발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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