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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 Aug 04. 2018

지워지는 것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

성평등 토크쇼를 다녀와서

 충남에서 보건교사들에게 성교육과 함께 성평등 교육을 담당하게 할 목적으로 보건교사 대상 성평등 교육 연수를 준비했다. 주최 측이 연수의 한 부분을 나와 같이 인권활동을 하는 선생님께 부탁했고, 선생님은 나와 우리 단체의 친구들과 함께 강의를 토크쇼 형식으로 진행했다. 우리 단체는 청소년들로 이루어진 인권 단체로 교육 현장의 목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우리가 말하는 양성평등”이라는 주제로 토크쇼를 진행했다. ‘양’ 자가 빠졌으면 더 좋았겠지만 성평등이라고 하면 입에 개 거품 물고 행패 부릴 혐오 세력을 눈치 보는 공무원들이 그렇지 뭐하고 말았다.


 토크쇼에서 다루는 주제는 여러 가지였다. 나는 그중에 학교에서 지워지는 성소수자들을 다루었다. 남자를 좋아하는 나는 학교에서 게이에 대해 배워본 적이 없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성소수자에 대해서도 배워보지 못했다. 남성과 여성으로만 규정되지 않는 다양한 성들이 있다는 것은 페미니즘과 젠더를 공부하면서 알게 되었다. 학교에서의 성교육은 이성애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그 이외의 성소수자들은 지워진다. 섹스도 여성과 남성의 성기만을, 섹슈얼리티도 이성애자 여성과 남성의 섹슈얼리티만을, 젠더도 여성과 남성만을 설명했다. 그렇다고 해서 여성의 성이 온전하게 설명되는 것도 아니다. 기존의 성교육은 여성의 성을 남성의 성 욕망의 대상이나 남성의 설명 방식으로 다루는 한계가 있다. 성소수자들은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여성과 남성의 성 특징을 동시에 갖고 태어나는 인터 섹스. 비교적 잘 알려진 동성애와 양성애. 상대의 성에 관계없이 사랑할 수 있는 범성애. 다른 사람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지 않는 무성애. 시스젠더, 트랜스젠더, 젠더리스, 제 3 의성, 젠더 플루이드 등등의 젠더 정체성. 성소수자는 섹스와 섹슈얼리티, 젠더의 영역 모두에 존재한다. 이렇게 다양한 존재들이 학교에서 이름조차 불려보지 못한다.


 성소수자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성소수자들의 자살로 이어진다. 1년간 성인 성소수자(LGB)의 자살 생각은 같은 기간 일반 성인의 자살 생각에 비해 약 8배 많다. 나는 토크쇼 초반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 앞서 보건교사들에게 성소수자들이 찾아와서 성상담을 한다면 어떻게 상담할 것이냐고 물었다. 실제 경험도 없고, 생각도 해보지 않았을 것이라는 예상대로  반응이 없었다. 나는 성소수자들이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고민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대답했다.


출처 : 성소수자 자살예방 프로젝트 마음연결


 성소수자에 대한 존재의 부정 문제는 개별 성소수자의 정체성의 부정을 넘어서 성소수자들의 문화를 음성적인 것으로 만드는 문제도 있다. 이성애 이외의 성이 가시화되지 않고, 그것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물리적 폭력을 포함한 사회적 차별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서 성소수자들의 문화는 음성화 된다. 음성화 된 성문화의 문제는 폐쇄성으로 인해 성소수자 개인들이 자신의 성을 온전히 누리지 못한다는 데 있다. 성소수자 커플이라면 당당하게 입을 맞추는 이성애자 커플을 부러워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퀴어 축제에 '반대'하는 혐오 세력 / 출처 : 허핑턴 포스트 코리아


 또 다른 문제는 지금과 같은 성교육은 사실상 성소수자 혐오를 양산한다는데 있다. 사회는 이성애 외의 다른 성들의 섹스는 없는 것으로 만들고 그들의 정체성은 부정한다. 교육은 앞장서서 성소수자에 무지한 사람들을 양산해낸다. 이것이 성소수자 혐오를 만들어 낸다. 이 문제는 단순히 무지한 상대에게 하는 사소한 말실수 정도가 아니다. 사회적으로 인정되고 설명되는 유일한 이성애 이외의 성들은 정상적인 방식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성, 즉 질병과 일탈로 설명된다. 이는 그 대상에 대한 폭력을 드러내도 된다는 인정이다.


 지금의 교육은 개인을 쓸모 있는 노동자원으로 만들기 위한 교육만을 강조하여 상대적으로 경시되는 것이 있다. 바로 공동체 구성원으로 갖추어야 할 권리와 의무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평화로운 공동체를 건설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약자나 소수자에 대한 폭력을 금지해야 한다. 소수자는 사회가 그들을 소수자로 만들기 때문에 소수자다. 어떤 특정한 기준을 가지고 그것에 미치지 못한 것들을 소수자라고 낙인찍는 것이다. 이는 그 기준이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은 내가 그 기준에 걸리지 않아 안심했다 해도 내일은 바뀐 기준에 낙인찍힐 수 있다. 약자와 소수자의 권리가 보장되는 것은 나의 권리가 보장되는 것이다. 개개인의 성소수자들의 존재를 부정하고, 그들이 자신의 성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게 하며, 혐오를 양산하는 지금의 교육은 바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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