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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 Aug 06. 2018

무엇이 그들을 Terf로 만드는가

워마드에 대한 비판

 페미니즘과 젠더 이슈가 뜨거운 요즘 워마드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워마드는 홍익대에서 발생한 누드모델 몰카 사건부터 최근의 성체 훼손까지 언론과 사회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 글은 언론에서 다루는 바와 같이 워마드의 ‘반인륜적’이거나 ‘폭력’적인 면에 대해서 비난하려는 글이 아니다. 또한 일베와 비교하며 같은 일도 여성이 하면 더 빨리, 더 크게 논란이 되는 것을 근거로 워마드를 옹호하기 위함도 아니다(물론 이 점은 일리 있는 지적이다). 이 글은 상호교차성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워마드로 대표되는 레디컬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 글이다.


참정권 운동에 집중한 1세대, 사회 전반의 여성 혐오와 맞선 2세대, 퀴어등과 같은 다양한 범주를 받아들인 3세대 페미니즘


 레디컬 페미니즘에 대한 상호교차성 페미니즘의 비판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페미니즘의 흐름을 짚는 것이 도움이 된다. 1세대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참정권 같은 법적인 권리에서 남성과 동등한 지위를 목표로 출발했다. 참정권 쟁취에 성공한 이후에 1세대 페미니즘 운동가들은 활동을 중단했다. 그러나 참정권 쟁취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에 대한 차별은 근절되지 않았다. 이를 본 2세대 레디컬 페미니스트들은 단지 법과 제도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라는 것을 지적하며 등장했다. 이들은 단순한 법적인 권리 쟁취만이 아닌 사회 전반에 걸친 성차별 근절을 목적으로 싸웠다. 레디컬은 급진적이라는 뜻도 있지만 뿌리라는 뜻도 있다. 단지 차별적인 법과 제도를 넘어서 그 법과 제도를 생산한 근본(가주장제)을 타파하자는 것이다. 3세대 상호교차성 페미니즘은 레디컬 페미니즘이 여성과 남성의 두 범주만을 강조하며 성을 단순화하는 것을 비판하며 등장한다. 이들은 한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여러 사회적 조건들이 동시에 교차되기 때문에 인종, 계급, 섹슈얼리티, 젠더 등 다양한 조건들을 포함하여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존 페미니즘이 중산층의 백인 여성 중심이라는 것을 비판하며 등장한 흑인 페미니즘이 그 예다.


TERF의 컨텐츠를 생산하는 트위터 계정 / 출처 : 무엇이 우리를 터프(TERF)로 만드는가 계정


 워마드는 이 중에 레디컬 페미니즘을 표방하며 특히 ‘TERF’의 성격을 띤다. ‘TERF’는 ‘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m’의 약자로 직역하자면 ‘트랜스 배제적 급진 페미니즘’이다. 이들은 젠더는 생물학적 성에 의해 결정될 뿐 다른 가능성은 없다고 주장한다. 세상에는 여성과 남성의 성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같은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트랜스젠더에 대해 비판한다. 그들이 스스로를 여성이라고 정체화하는 것은 사회가 만든 여성성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젠더 수행은 여성에게 강요되는 여성성을 견고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트랜스젠더나 다른 성소수자들이 페미니즘의 담론에 주요하게 등장하는 것도 레디컬 페미니즘은 비판한다. 이들은 생물학적 여성만이 가부장제의 피해자이며 여성의 권리 신장만이 진정한 페미니즘이라 주장한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영역인데 그 자리에 장애인, 성소수자 등이 침범하면서 여성의 권리는 나중으로 미뤄질 것이라고 우려하는 것이다. 이들의 논리는 언뜻 그럴 듯 해보이지만 오히려 가부장제를 견고하게 하는 등 여러 위험성이 있다. 이제부터 각각의 주장의 위험성에 대해 알아보자.


 이들의 핵심은 생물학적 여성 이외의 성을 배재하는 것인데 이는 다양한 문제를 야기한다. 우선 생물학적 성별에 따라 남성과 여성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다양한 성소수자의 존재를 지운다. 이들은 여성과 남성의 생물학적 특징을 동시에 지니고 태어나는 인터섹스를 장애라고 부정한다. 트랜스젠더와 여타의 젠더 퀴어들의 젠더정체성을 단순한 망상으로 치부한다. 이들은 젠더와 정신병자를 합성하여 ‘젠신병자’나 젠더와 병신을 합성하여 ‘젠신’과 같은 혐오표현을 일삼는다. 트랜스젠더를 비꼬며 트랜스고양이, 트랜스돌멩이와 같은 저급한 표현을 쓰기도 한다. 이들의 논리는 가부장 질서의 성별 이분법과 다르지 않다. 생물학적 성에 의해 사회적 성인 젠더까지 결정된다면, 섹스에서 비롯된 여성성이나 남성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며 개인은 어떠한 노력을 해도 이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그들이 여성혐오라고 줄기차게 주장해온 만들어진 여성성에 대한 비판과 모순된다. 오히려 트랜스젠더나 젠더 퀴어의 존재는 성별 이분법 해체에 도움이 된다. 이들은 생물학적 성으로 규정되는 젠더를 탈피함으로써 젠더 이분법에 균열을 낸다. 젠더를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남성 중심의 성별 이분법의 해체를 촉진하는 것이다.


워마드가 사용하는 혐오 표현 '똥꼬충'과  '젠신' / 출처 : 워마드


 이들의 성소수자 배제는 배제를 넘어서 혐오로 이르고 있다. 이들은 여성 이외의 성소수자 특히 MTF(male to female) 트랜스젠더나 게이에 대한 혐오 표현을 자행한다. 이들은 트랜스젠더에 대해서 ‘젠신병자’나 ‘젠신’, 게이에 대해서는 ‘똥꼬충’과 같은 혐오표현을 쓴다. 이들은 남성 성소수자 내부에서의 여성혐오를 이유로 들어 자신들의 혐오 표현을 정당화한다. 애초에 워마드 태생 자체가 메갈리아에서 남성 장애인이나 남성 성소수자를 미러링의 대상으로 설정할 수 있다는 쪽이 불가하다고 한 운영진 측에 반발하며 분리 독립한 것이다. 물론 성소수자 내부의 여성혐오에 대한 비판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 방식이 잘못되었다. 그들이 지닌 소수자성을 공격하는 것은 가부장제의 혐오 매커니즘의 확대 재생산에 지나지 않는다. 앞서 언급했듯이 트랜스젠더나 젠더 퀴어에 대하여 소수자성을 공격하는 가부장제의 혐오 논리를 반복하는 것은 성별 이분법을 강화하며 성기 화원주의로 흐른다. 게이에 대한 혐오도 그렇다. 게이가 혐오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여성혐오와 맞닿아 있다. 이성애자 남자들은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우월성을 다져왔다. 게이는 같은 남성에게 성욕을 느끼는 존재다. 게이의 존재는 이성애자 남성들이 자신이 성적 대상화될 수 있다는 공포로 작용한다. 즉, 여성의 위치로 전락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게이에 대한 혐오를 불러오는 것이다. 이처럼 성소수자에 대한 비판을 그들의 소수자성을 조롱하는 방식으로 하는 것은 여권 신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생물학적 여성만을 가부장제의 피해자로 설정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앞서 얘기했듯이 다양한 성소수자들 또한 가부장제의 피해자이며 이들의 혐오논리는 여성 혐오의 그것과 닮아 있다. 가부장제에 피해를 당한 정도에 따라 페미니즘의 대상과 주체가 될 자격이 주워 지는 것이라면 이는 서로의 피해자성을 두고 줄 세우는 짓이 된다. 피해자성의 위계를 중심으로 발원권이 주워지는 것이라면 여성들만의 경험이라도 다양하게 논의될 수 없을 것이다. 피해자성을 중심으로 줄 세우는 것과 비슷한 일이 실제 일어나고 있다. 워마드에서 탈코르셋을 하지 않는 여성들을 가부장제 부역하는 ‘가짜 여성’으로 낙인찍어 비난한다. 특히 여성 연예인들을 향해 그들이 얼마나 페미니즘에 충성적인지를 끊임없이 검열한다. 가부장제에 대해 자신들이 제시한 방법으로 저항하는 사람들은 ‘진짜 여성’,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가짜 여성이고 가부장제 부역자라고 비난한다. ‘진짜’ 논의는 이미 제주도 예맨 난민 사건에서도 나타난다. 이런 식으로 진짜를 끊임없이 솎는 행위는 페미니즘의 외연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또한 피해자성을 강하게 드러내며 그것만을 페미니즘 운동의 동력으로 삼으려는 시도는 여성을 가부장제의 피해자로서만 위치시키면서 여성의 주체성을 박탈할 위험이 있다. 여성이 언제까지나 피해자로서만 존재한다면 전복 가능성은 없다.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는 여성들을 '흉자(흉내자지)'라 칭하며 비난하고 있다. / 출처 : 워마드


 탈코르셋 논의에서 좀 더 주목해 보고 싶은 점이 있다. 탈코르셋 운동 자체는 의미있는 운동이나 이 운동의 진행방식에 있어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레디컬 페미니즘이 가부장제와 마찬가지로 여성적인 것을 생산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것이다. 가부장제가 여성성을 생산하여 여성에게 강요했다면, 그와 다르게 워마드는 신자유주의에서 터부시되는 어떤 특정한 성질을 사회가 덧씌운 여성성이라고 억제하려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1세대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 중에 1세대 페미니즘이 남성적인 것을 여성이 추구해야 할 것으로 상정했다는 비판이 있다. 여성을 후천적으로 학습되는 것으로 간주한 의의는 있지만 그 특성을 열등한 것으로 치부하고 남성적인 것을 정상적인 것이자 추구해야할 것으로 상정했다는 비판이다. 지금 워마드에도 이와 같은 면이 있다.


생물학적 여성만을 위한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워마드의 글들 / 출처 : 워마드


 마지막으로 페미니즘의 논의에 등장한 여성을 제외한 약자나 소수자를 여성의 영역에 침입한 불순물로 보는 것에 대한 문제다. 이들은 페미니즘의 주체와 대상을 생물학적 여성으로만 설정한다. 이는 페미니즘의 외연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을 뿐만 아니라, 진짜 여성에 대한 논의로도 이어진다. 과연 단일한 범주로서의 여성은 존재하는가? 여성의 경험이라 해도 계급, 인종에 따라 무수하게 달라진다.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여성과 자본가 가정에서 태어난 여성의 경험이 같을 수는 없다. 백인 여성과 유색 인종 여성의 경험이 같지 않을 것이다. 제국주의 국가의 여성과 식민지 국가의 여성이 똑같은 경험을 공유하지는 않을 것이다. 워마드는 하나의 경험을 공유한 여성만을 페미니즘 주체이자 대상으로 인정하고 다른 여성의 경험을 무시한다. 여성들의 다양한 경험과 더불어 주변화된 장애인, 퀴어와 같은 주체들의 연대야 말로 가부장제 붕괴를 촉진시키는 방법이다.


 워마드의 주장은 그럴싸하고 페미니즘적인 것으로 보이나 실상은 가부장제와 성별 이분법 고착화에 기여하는 위험이 있다. 생물학적 성 이외의 성을 배제함으로써 남성과 여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다양한 성들을 부정한다. 배제에서 그치지 않고 가부장제의 혐오 매커니즘을 그대로 답습하여 소수자 혐오를 확대 재생산한다. 여성 안에서도 피해자성과 그 충성을 기준으로 줄 세우기를 통해 다양한 여성의 목소리를 제거한다. 사회에서 옳지 못한 것으로 규정되는 것에 여성성의 이름을 붙여 배제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생물학적 여성만이 페미니즘의 주체와 대상이 될 수 있다며 페미니즘의 담론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레디컬 페미니즘은 분명 그 의의를 가진다. 그러나 한계 또한 분명하다. 이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페미니즘 논의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이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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