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9살. 마지막으로 뵌 증조할머니...

by 헤엄치는 새

나의 어머니는 아버지 그러니까 외할아버지를 일찍 여의셨다.

이모는 유복자였다.

그런 자매를 키우신 건 외할머니가 아니라 증조할머니셨다.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그곳을 나와 후에

재혼을 하신 터라 어머니와 이모를 데려다 양육할 형편이 아니었다.


그렇게 어머니는 충청남도 공주에서 증조할머니, 그리고 작은 외할아버지에게 의탁을 한다.

하지만 더부살이는 고됐다.

가사노동, 농사일 그리고 같은 항렬의 핍박(?)도 있었다.

이쯤 되면 매일매일 눈물바다라 생각했겠지만, 어머니는 예나 지금이나 강한 분이셔서,

오히려 들장미 캔디 같은 느낌이었으라...


우리 어머니라서 그런 건 아니지만,

시골 사진첩에 있는 10대 때의 어머니는 야리야리하고 이쁜 순박한 시골소녀의 모습이었다.

거기에 당당하기까지 했으니 어느 누가 봐도 며느리 삼고 싶지 않았을까 싶다.

성인이 된 어머니는 이모와 함께 서울에서 공장생활을 했다.

70년대 대부분의 젊은이는 대도시로 가 생계를 꾸려야 했다.

어머니 역시 그러했다.

어머니의 취업은 이모의 활발한 성격이 한 몫했다.

그렇게 자매가 서울에서 일을 할 때 외할머니와 재회를 했다.


그리고 의붓아버지와 남동생 2명이 더 생겼다.

어느 순간 어머니는 그들을 부양하는 가장이 되어있었다.


어머니는 결혼 적령기가 되어 부산의 어느 남자 즉 아버지와 선을 보고 결혼했다.

결혼식 당시 어머니는 '김'씨 성이 아닌 의붓아버지의 '전'씨 성을 써야 했다.

어머니는 내가 왜 '전'씨여야 하냐고 울고불고 난리였지만,

결국 어머닌 '김'연호가 아닌 '전'연호가 되어 결혼식을 치렀다.


그리고 '전'씨 성으로 결혼식을 치르는 장면을 증조할머니는 어떤 마음으로 지켜봤을까...



어머니는 결혼 후 부산에서 터를 잡으셨고

그 후 충남 공주를 방문한 건 내 나이 6살과 8살 때였다.


그리고 무슨 일인지 9살 때 증조할머니께서 부산에 내려오셨다.

80세를 훌쩍 넘기신 분이 불편한 몸으로 부산에 오신다는 연락을 받고,

어머니는 그날 일을 조퇴하고 터미널에 가서 증조할머니를 모시고 집에 왔다.


학교 수업을 마시고 집에 오니 증조할머니께서 와 계셔서 내심 놀랐다.

사실 좀 서먹서먹했다.

자주 뵙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한쪽 눈이 백내장으로 흐릿한 하얀 눈이 무서웠다.

증조할머니는 고쟁이 깊은 곳에서 돈을 꺼내 쭈뼛쭈뼛 거리는 증손자에게 2000원을 쥐어주셨다.

곰팡이가 가득 핀 2000원...

그리고 따뜻하면서 주름진 손...


그날 저녁은 말할 것도 없이 푸짐한 저녁이었다.

어머니와 증조할머니는 밤이 늦도록 얘기를 나누셨다.

증조할머니는 아버지의 귀가가 늦다고 걱정하셨지만, 어머니는 얼버무리며 넘기려 했다.

아마 밤새도록 놀음에 빠져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


다음날 학교에 가려는 나를 증조할머니는 주름 가득한 손으로 내 얼굴을 만지시고는 희미하게 웃으셨다.

어머니는 걱정 반 아쉬움 반이었으리라...

증조할머니는 공주에 잘 올라가셨고 그 모습이 마지막일 거라고는 나도 어머니도 몰랐다.

몇 달 후 충남 공주 작은 외할아버지께서 연락이 왔다.

증조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고 했다.

연세가 많으셔서 돌아가실 때가 됐지만 어머닌 임종조차 지켜보지 못했다.


증조할머니의 부고 소식을 듣고

어머니는 정말 많이 우셨다.

그렇게 오열하는 어머니가 걱정돼서 나 역시 같이 울었다.


하지만 당장 공주에 갈 수가 없었다.

며느리 격인 외할머니는 재혼하셔서 갈 수 없었을 테고, 아버진 노름과 술로 가지 않으려 했다.

나와 동생을 외할머니께 맡기고 가셨으면 됐을 텐데 어머니 역시 그러지 않으셨다.

가장은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셨고, 가지 않은 건 분명히 이유가 있었다 생각한다.


아버지는 그렇게 우는 어머니가 불만이신지

술을 드시고 오면 오히려 더 윽박질렀다.


나중에 이모를 통해 잘 보내드렸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한참 후 증조할머니 묘소를 찾았다.

잔디는 잘 입혀졌는지 볕은 잘 드는지 그렇게 묘를 만지시고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우셨다

어린 내가 할 줄 아는 거라곤 그런 어머니를 안아주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어머니도 나도 나이를 먹었다.


작년 제사 때도 증조할머니와 외할아버지 묘소에 다녀오신 어머니...

이번엔 코로나 때문에 못 간다고 아쉬워하셨다.


지금은 집에서 가까운 절에 모셔서 공양을 드리고

등을 달아서 늘 명복을 비는 어머니를 보면 소녀 같다고 생각한다.


10대 시절의 쾌활한...

증조할머니, 이모랑 함께 산에 가서 밤도 캐고 나물도 캐던 순진한 시골소녀의 모습

그렇게 공양을 드리고 오시면 주름마저도 한결 귀여워 보이는 우리 어머니...


어머니는 증조할머니랑 어떤 얘기를 나누고 오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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