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열광했던 오락실은 프라모델로 진로를 변경했다.
지금이야 일본의 반다이에서 많은 종류의 프라모델을 판매하고 있지만,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땐 수많은 국내 회사가 군웅할거처럼 활동하는 시기였다.
똑같은 모델인데도 만든 곳에 따라 가격, 퀄리티가 달랐고, 수많은 프라모델이 문방구 쇼윈도에 전시되어 판매되고 있었다.
어렸을 땐 그냥 '로봇'이라 불렀다.
후에 그것이 일본의 '건담'이라는 걸 알게 된 건 12살, 그러니까 초등학교 5학년 때쯤이었던 듯싶다.
오락실에서 쓰던 동전들은 모으고 모아 프라모델 사는데 쓰였다.
그 당시엔 500원짜리 프라모델도 잘만 고르면 퀄리티가 좋았다.
어느새 난 친구들과 노는 것보다 이런 프라모델 제작에 흥미를 느꼈다.
완성된 프라모델을 보면 해내었다는 성취감과 고양감이 나를 뿌듯하게 했고, 이런 감정은 잦은 구매를 유도했다.
처음엔 별말 없던 어머니도 매일 방구석에서 프라모델만 조립하는 내가 조금 염려스러웠나 보다.
어머니께선 그 돈으로 친구들이랑 과자도 사 먹고 어울리길 바라셨지만, 이미 나의 상상력은 현실의 놀이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풍부해진 뒤였다.
덤으로 SF만화도 좋아하게 되어, 나의 연습장엔 수많은 낙서가 생성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또래 아이들과의 놀이는 시시했을뿐더러 주변 친구들은 나의 이런 상상력이 약간의 기행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는 프라모델을 볼 때마다 화내는 빈도가 잦기 시작했다.
아마 그녀의 눈엔 쓸데없는 플라스틱 정도였으리라.
먹을 수도 없고, 좁은 방을 지저분하게 차지하는 프라모델이 곱게 보였을까?
이는 무시할 수 없는 요소였다.
그렇게 어머니께 경고를 들은 이후부턴 나는 프라모델을 숨겨두기 시작했다.
장롱 아랫 서랍, 다락방, 10살 아이가 숨겨둘 만한 곳엔 다 숨겨봤던 듯싶다.
하지만 늘어나는 프라모델을 감추는 건 한계가 있었다.
어쩌다 어머니께서 방청소를 하시는 날이면 우르르 쏟아져 나와
'이게 다 돈이 얼마냐!!'
하며 화를 내셨고, 나는 그런 어머니의 질책에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그런 장소는 뜻밖에 획득했다.
어느 날 어머니를 대신해 옥상에 빨래를 걷으러 간 날이었다.
한편에 늘어선 장독대를 보고 머릿속이 번쩍했다.
'저기다 프라모델을 보관하자'
얼마나 안정적인가!!!
남의 장독대를 건드는 사람은 없을 테니, 분실의 위험도 없고, 무엇보다 기발하다 생각했다.
그 뒤 나는 프라모델을 조립하고, 어머니가 오시기 전 장독대에 몰래 넣어두기 시작했다.
특히 장독대에 넣기 시작한 프라모델은 돈을 모아서 산 나름 고가의 프라모델이었다.
그렇게 옥상에서 놀다 어머니가 부르기라도 하면 으레 바람 쐬고 있었다고 핑계를 대기도 했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아니 순조로웠다 생각했다..
그런 나의 성역은 어느 날 공중분해되었다.
그날도 만들어놓은 프라모델을 가지고 놀려고 옥상에 올라갔다.
장독대 뚜껑을 연 순간 난 망연자실했다.
내가 평소에 프라모델을 넣어둔 장독대엔 프라모델은 없고, 간장이 들어있었다.
난 행여 다른 장독대를 연 것인가? 의심했다.
옆의 장독대를 열고, 모든 장독대를 열어봐도 없다.
그렇다!!!
어머니께선 장독대 본래의 역할을 수행하게 한 것이다.
간장이라니...
난 장독대 안의 간장을 흐리멍덩하게 쳐다보다 뚜껑을 닫았다.
그날 저녁, 난 어머니께 프라모델의 행방을 여쭈지 않았다.
왠지 내가 먼저 말했다간 매타작이 기다릴 거 같았다.
그렇게 10살 나의 프리미엄(?) 프라모델은 흔적도 없이 사려졌다.
얼마 후 방구석에 돌아다니던 녀석들도 지저분하단 이유로 다 처분됐다.
아마 어머니는 내가 느낀 허탈감과 상실감을 몰랐을 것이다.
이 일 이후엔 프라모델 구매가 확연히 줄었다.
어쩌면 잘 된 일이다.
나의 용돈으로 프라모델만 사기엔 부족했으니...
하교 후 문방구 쇼윈도에 보이는 프라모델 상자...
사면 버려진다라는 걸 알게 된 10살 나는 그냥 하염없이 그것을 바라볼 뿐이다...
성인이 돼서도 프라모델은 정말 사고 싶었다.
하지만 사고 싶어도 금전적 여유가 없어서 늘 보류해 왔던 듯싶다.
여자 친구가 있을 땐 데이트 비용 때문에...
지금은 보험료, 은행이자부터 해서 나가는 공과금 때문에...
만약 사게 된다면 10살 그때처럼 즐거워할까?
가끔 아무것도 아닌 걸로 즐거웠던 그때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