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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luto owl Nov 05. 2020

essay) 사장 왈 ‘넌 내가 잘못 뽑았다.’

순서 없는 나의 직업 생존기 vol 02

29살에서 30살이 되었을 때 난 인생의 큰 굴곡점이 생길 거라 생각했다.

앞자리의 변화와 더불어 내가 이루고 싶은 거, 되고 싶은 거를 마음에 담아 앞으로 나가려 했지만 아무런 준비 없이 그런 게 될 리 만무했다.


거기다 당시 5년 사귄 여자 친구는 나의 경제적 무능력을 이유로 이별을 고했고, 난 그 뒤로도 변변한 직장 하나 옳게 다니지 못한 체 무기력한 시간을 보냈다.

나이의 앞자리가 2에서 3으로 바뀌기만 했을 뿐,  나를 둘러싼 상황은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실망, 좌절, 허무 그 당시 나에게 깃든 거라곤 이토록 우울하고, 어두움뿐이었으리라...


설상가상으로 아버지의 주폭은 나날이 심해졌다.

그곳은 더 이상 나의 집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나가고 싶다.

독립하고 싶다. 항상 그 생각뿐이었다.

그러려면 어떻게든 직장을 구해 이 지긋지긋한 곳을 벗어나야 한다.

매일매일 그렇게 생각하며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 어디 쉽게 변하는가?

난 헤어진 여자 친구를 핑계 삼아, 없는 돈으로 술을 마시거나,

내방 이불속에 숨어 하루하루를 낭비하고 있었다.

그렇게 난 나의 30대를 술과 나태함으로 채우고 있었다.

그날도 건성으로 구직사이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런 내 눈에 띈 건 목공방에서 직원을 구하는 내용이었다.

단순한 생산직보단 나아 보였다.

어쩜 내가 빨리 일을 때려치우는 건 그런 단순함 때문일 거라 생각했던 터라, 조금은 유심히 읽어보았다.


삼나무, 단풍나무, 물푸레나무 소위 원목으로 가구를 만드는 곳...

근무시간, 급여도 협의다.

장소는 울산이었다.

부산 사람인 내겐 울산은 출퇴근이 버겁다.

그래도 해볼 만 한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일단 공방에 전화를 걸었다.

면접 날짜를 잡고 며칠 뒤 그곳을 방문했다.


사장이라는 분은 스포츠머리에 약간은 건달 같은 느낌을 풍겼다.

아마 덩치가 커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사장은 내게 이런 공방에서 일한 경함이 있는지, 왜 지원했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근무시간은 09시부터 21시

급여는 3개월 수습이라 최저시급보다 못한 돈을 제시했다.

사장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나에게 그 자리에서 결정하도록 은근히 강요했다.



난 집을 벗어나고 싶단 생각에 앞뒤 안 재고 일하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부산이라 집을 구해야 하니 1주일 정도 시간을 달라고 했다.

사장도 흔쾌히 승낙하며 1주일 뒤에 보자며 나에게 악수를 건넨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와 어머니께 울산에서 일하게 됐다 말씀드렸다.

어머니께선 집은 어떻게 구할 거냐라는 말에 염치없게 돈을 빌려달라 했다.

난 보증금이랑 한 달 월세를 빌려주면 차곡차곡 갚겠다 말했다.


어머니는 아들이 나가서라도 돈을 벌려고 하니 거절하진 않으셨다.

하지만 없는 살림에 돈 몇백은 몇천이나 진배없었으리라…


다음날 난 울산에서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공방이 있던 자리는 울산 남구 달동이었다.

달동이라 하면 울산시내였고, 그곳엔 백화점과 버스터미널, 그 밖의 문화시설이 있는 울산의 노른자 땅이었다.

그곳과 인접한 삼산동…

난 그곳에 원룸을 알아보고 있었다.

이왕 울산으로 집을 구하면 도보로 출퇴근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보증금을 500 정도로 잡으니 한 달 월세가 50~70 정도였다.

비싸다…

이틀 정도 부동산을 통해 500에 월 40의 1층 원룸을 구했다.

그리고 그곳엔 벽걸이 에어컨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세탁기도, 냉장고도…


부산에 와서 작은 냉장고와 밥솥 한 개를 샀다.

세탁기는 나중에 돈 벌면 사기로 했다.

그동안 속옷, 양말 같은 건 손으로 빨고, 옷은 모아서 부산 집에서 빨아야겠다 생각했다.

결국 어머니께 빌린 보증금, 월세 돈 외에 소소하게 더 들어가고 있는 셈이었다.


며칠 뒤, 그렇게 준비해서 울산으로 이사를 했을 때

난 너무나 기뻤다.

물론 내 돈으로 치른 건 아니지만, 아버지에게서 벗어난 그것 만으로도 난 너무나 행복했다.

그 지긋지긋한 술, 담배냄새를 안 맡아도 되고, 술주정을 듣지 않아도 된다.

무엇보다 반듯한 내 공간이 생긴 게 기뻤다.

여기서 기술 제대로 배워서 나중에 내 공방도 하나 차려야지 하며 황금빛 꿈을 꿨다.


하지만 그 꿈도 잠시뿐이었다…

그렇게 나의 공방일이 시작됐다.

당연하겠지만, 처음부터 타카를 잡거나 나무를 자르는 일은 하지 못했다.

허드렛일과 가구의 페인트칠이 일상이었다.

나무를 자르면 샌딩기로 곱게 다듬고, 사장이 만들어 놓은 가구에 페인트칠을 하고, 주변을 정리하는 게 나의 주요 업무였다.

그리고 가끔 가구배달을 따라가기도 했다.


9시부터 21시까지만, 사실 준비하고 마감하면 이보다 더 일찍 와서 늦게 끝나는 게 일상이었다.

점심, 저녁은 준다지만 노동이 몸에 베지 않은 나로선 너무 고됐다.


그리고 일하면서 느낀 건, 사장은 내게 허드렛일 이상은 시키지 않았다.

어쩌다 다리 조립 같은 걸 시키기도 했지만, 행여 실수라도 하면 고함소리를 듣기 일쑤였다.

그리고 그런 실수가 반복되기라도 하면 사장은 이런 식으로 하면 수습을 연장하거나, 급료에서 손해분을 제하겠다는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하기도 했다.


결국 난 사장 맘에 들지 않는 직원이 되었다.

난 그런 허드레 일 말고도 사장 내외의 차를 세차하기에 이른다.

사장의 차는 크라이슬러의 닷지 차량인데, 세차하다 내가 흠집을 냈다며, 나에게 노골적으로 화를 냈다.


그런 일상은 나에게 스트레스일 뿐이었다.

매일매일 욕을 안 먹는 날이 없었다.

난 점점 기가 죽어 움츠려 들고, 눈치 보는 사람이 되었다.

작은 거 하나에 실수한 거 아닌가 하고 조마조마하는…

이런 건 내가 아니었다.

그리고 어김없이 고함소리가 들려온다.


급료 역시 최악이었다.

그는 정말로 자기가 손해 본 부분을 제하고 급료를 붙였다.

최저시급보다 못한 금액에 자기 멋대로 제한 손해분…

받은 급료에서 월세랑 생활비를 제해 보니 적자였다.

이는 결국 어머니께 손을 벌려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난 아무것도 없는 휑한 방 안에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본다.

답답하다.

나의 삶이 불쾌한 소리를 내며 나를 이끌고 있다.

망가질 것만 같다.

이불에 나를 눕혀도 쉽게 잠이 오지 않는 밤이 계속 이어진다.

그날은 사장이 아침부터 나에게 고함을 쳤다.

뒷정리를 안 하고 퇴근했다는 것이다.

사실 뒷정리는 했지만, 그의 맘에 들지 않았을 터이다.


급료도 엉망이고, 매일 욕먹는 걸로 하루를 시작하니 결국 나도 폭발해 버렸다.

그냥 그만두겠다고 고함치며 나왔다.

뭐라도 엎고 나왔어야 하는데…


다시 집으로 돌아가며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죄송하다고…

잘해 보려 했는데 결국 이렇게 됐다고…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렇게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괜찮다고 하셨지만,

난 우는 그 순간에도 다음 달 월세를 걱정했다.


벼룩신문을 보고 야간 알바 자리라도 알아봐야 했다.

하지만, 한번 꼬이니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었다.

결국 변한 거 없이 장소만 내 방에서 울산 원룸으로 바뀌었을 뿐, 나에게 주어진 고난을 제대로 마주하지도 않은 체 도망만 쳤다.


어머니께선 그냥 부산 집으로 돌아오라고 하셨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수입 없이 원룸 월세를 감당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2달 반의 울산 생활은 그렇게 끝나버렸다.


다시 부산 집으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의 얼굴을 봐서 반가웠지만,

난 여기를 벗어날 수 없는 건가 하는 우울한 감정도 다시 돌아왔다.

아버지의 술주정, 어머니의 안타까움 난 더 이상 그것을 마주 볼 용기가 없었다.

이 안타까움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다는 상실감…

난 뭘 해도 안된다는 좌절감…

그렇게 난 심연에서 허우적거리다 맥없이 잠기고 있었다.

나의 30대의 시작은 너무나 쓰다…



그때를 회상하면 이건 시작에 불과하구나 싶더라.

그 뒤 난 더 많은 눈물을 흘리고, 더 많이 좌절했으니 말이다.

여전히 힘들고, 돈 이란 저 멀리 있는 신기루 같지만…

지금은 그때보단 훨씬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는 듯싶다.

아직 내가 갈 길은 멀지만, 힘들다고 멈출 순 없지 않은가?

지금 나는 나만의 순례길을 걷고 있는 듯싶다.

그 길 끝엔 내가 웃을 일만이 가득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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