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내렸다.
다른 이들은 오늘 야간작업이 끝났는지 조용하다 못해 적막함이 느껴질 정도다.
들리는 건 집 주변 냇가의 소리와 그 물결로 인해 맞장구치는 연잎의 찰랑거림 그것뿐이다.
나는 왜 그들과 함께 하지 않았나?
이유는 간단하다.
무리에서 해고통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근무태만 즉 짝짓기를 위해 부지런히 울지 않았다는 것이다.
모든 동료 개구리들이 비웃는다.
되든 안되든 목청껏 울어 암컷 개구리를 유혹하라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암컷 개구리도 눈이 있다면 다 쓰러져가는 집, 그것도 빚까지 있는 작고 초라한 집을 좋아할 리 없다.
자손 번식이 지상 최대의 목표인 이곳과 난 맞지 않는다.
내가 살아서 죽을 때까지 알을 부화하는데 평생을 소모하란 말인가? 난 그렇게 못한다
나에게도 원대한 꿈이 있다
나에겐 이 모든 걸 기록하는 멋진 개구리가 되고 싶다.
하지만 주변에선 비웃음뿐이다.
그렇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한마디로 뭔가 특출한 개구리는 선택받은 소수일 뿐, 우리 같은 평범한 개구리는 이 냇가를 위해 부지런히 알을 낳고 부화하고, 기르며 윗 포식자의 풍부한 먹잇감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누군가는 학의 뱃속에 누군가는 수리의 발톱에 채어가는 단조로운(?) 생을 살고 마감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처럼 보이는 것이 무척이나 애처롭게 보였다.
이왕 무리에서 쫓겨났으니 난 좀 즐겨야겠다.
여기보다 좀 더 넓은 개울도 찾아보고, 나처럼 지금의 삶을 거부하는 다른 개구리는 없는지 찾아보고 싶다.
어차피 계절이 지나면 우리는 약속한 듯 쇠약해지고, 또 포식자의 먹잇감이 되고자 그들이 지나가는 길목에서 손을 흔들 것이다.
보통은 ’잘 살다 간다’라고 말할 테지만, 이런 삶이 과연 잘 산 삶일까?
세상을 살면서 정신적 충만을 얻을 수 없다면 저기 냇가바닥의 플라나리아보다 못한 삶이 아닌가?
물론 정신적 충만은 짝을 만나면 저절로 채워진다고 말하는 개구리들도 있다.
하지만 짝짓기라는 하나의 수단으로 채워진 정신적 충만이라면 결속의 해제 이후 정신적 충만은 고갈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결코 옳은 선택이 아니다.
나는 지금의 나에게 맞는 정신적 충만의 방법을 알기 위해 게으른 개구리가 된 듯싶다.
오늘도 게으름(개굴)
내일도 게으름(개굴)
언제나 게으름(개굴)
난 나의 존재를 찾고 정신적 충만이 도래하는 그 순간까지 게으른 개구리로 살리라…
개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