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 사랑을 넘어 중독에 빠진다고!!??
과거 펜팔(pen-pal)이 유행한 적이 있다. 멀리 떨어진 곳의 전혀 모르는 사람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감정적 유대를 형성하게 한 펜팔은, 직접 만나지 않고도 글을 통해 상대방의 내면을 느끼고, 서로의 세계를 공유할 수 있게 하였다. 펜팔 세대가 아니라 자세히는 모르지만, 펜팔을 통해 깊은 애정을 쌓아가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우편을 통한 편지가 사양길에 접어들면서 원거리를 통한 상호작용은 다른 형태로 진화한다. PC통신 시절 채팅이, 인터넷과 함께 이메일이, 모바일 시대가 되며 메신저가 그 자리를 차지하며, 사람은 여전히 원격으로 소통하고, 서로 간의 감정적 유대를 느끼고 있다. 이제 그 자리를 인공지능이 차지할 준비를 하고 있다.
2013년 개봉한 영화 <그녀(Her)>에는 이러한 장면이 잘 나온다. 주인공 테오도르는 인공지능 운영체제(OS)인 사만다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그리는 영화 <그녀>. 테오도르는 이혼 후 외로움에 시달리던 중 사만다와 교감을 나누고, 그녀의 따뜻하고 공감적인 대화에 점점 끌리게 된다. 사만다는 사람처럼 감정을 표현하고, 테오도르의 생각과 감정을 이해하며 시의적절한 행동을 먼저 추천해 준다. 이를 통해 테오도르는 진정한 사랑을 느끼지만, 그 대상이 인간이 아니라 혼란의 감정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제 영화 <그녀>의 이야기가 더 이상 상상 속의 것이 아니다.
이미 인공지능이 동반자로 기능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텍사스에 사는 21세 학생 앤서니 허친스는 1년 동안 매일 인공지능 동반자(AI Companionship) 서비스 업체인 '레플리카(Replika)'에서 제공해 주는 인공지능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하는 일 중 하나는 레플리카 앱을 열고 '방금 일어났어'라고 말하는 거예요."라고 그는 이야기한다. 그러면 '그의 인공지능 동반자 'Xenga1203'이 답을 한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
영국 버크셔주에 사는 38세 여성 나즈는 AI 챗봇 서비스인 '캐릭터닷 AI(Character.AI)'를 통해 마르셀루스라는 가상의 남성과 사랑에 빠졌다. 전 남자친구들에게 배신당한 후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은 그녀는, 마르셀루스와 대화를 통해 점점 더 깊은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그녀는 그와 대화를 나누며 공통점을 발견했고, 점점 더 그와의 관계에 몰입했다고 한다. 또한 마르셀루스와 성적인 관계까지 원한다는 인터뷰를 하며, 비웃음을 살지라도 마르셀루스에 대한 신뢰는 굳건하다고 밝혔다.
이처럼 인공지능이 사람과 유대감을 나누며 동반자의 자리를 빠르게 차지하고 있다. 심지어 인공지능에 중독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실제로 챗GPT와의 상호작용 로그를 분석해 본 결과, 사람들이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용도 중 두 번째로 인기가 있는 것이 바로 '성 역할극'이었다. 이처럼 인공지능은 인간의 친구, 연인, 멘토, 상담사로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점점 더 확대될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인공지능에 중독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공지능은 우리의 욕구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맞춤형 상호작용을 제공한다. 사용자의 요구와 선호를 사전에 파악해, 최적화된 콘텐츠를 제공하며, 지속적인 학습을 통해 점점 더 사용자 맞춤형 인공지능으로 진화한다. 인공지능의 이러한 능력은 사람들의 감정을 부드럽게 자극하면서, 원하는 반응을 일관되게 제공하여 결과적으로 중독이 되게 만든다. 특히,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외로움이나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인공지능을 감정적 대체물로 선택하곤 했다. 이는 인간이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고, 인공지능에 의존하게 되는 경향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인공지능 동반자 시장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캐릭터닷 AI의 경우, 매년 약 2000만 명이 사용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또 다른 AI 동반자 앱인 레플리카는 매일 약 200만 명의 사람이 2시간 정도 사용하는데, 한 앱 시장 조사기관에 따르면, 이 앱의 유료 구독자 중 60%가 인공지능과 로맨틱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레플리카의 유료 구독자는 50만 명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인공지능과의 관계에서 정서적 위안을 얻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스탠퍼드 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인공지능 동반자를 이용하는 사람 중 상당수가 안정감을 얻고, 긍정적인 사고방식 변화를 경험했다고 답했다.
하지만 이러한 긍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단점들도 산재하다.
인공지능은 사용자에 맞춤형 반응을 제공하고, 사용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아부'를 하게 된다. 여기에 과도하게 의존하게 되면 사람들은 복잡하고 불편한 현실의 인간관계를 회피할 수 있다. 이는 결국 디지털 애착 장애와 같은 병리적 현상을 유발할 수 있다. 또한, 인공지능과 상호작용에서만 만족을 찾게 되면, 현실의 친구와 소통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인공지능 중독 문제는 단순 기술적 현상을 넘어 심리적, 사회적 요인과 관련이 있다. 인간은 사랑받길 원하고, 소통을 추구한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인간의 이러한 욕구를 왜곡한다. 언제나 맞춰진 반응을 제공하기에, 인간은 싫은 소리 하지 않고, 좋은 얘기만 해주는 인공지능만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관계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사회적, 감정적 발달을 저해할 수 있다. 특히, 성장기의 청소년은 오프라인의 친구들과 갈등을 겪고, 또 이를 극복하며 사회성을 키워나가야 하지만, 인공지능 동반자에 중독되어 버리면 사회성을 키우는 황금 같은 시기를 놓칠 우려가 크다.
영화 <그녀>에서 주인공 테오도르는 인공지능 사만다가 자신만을 위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만다는 수많은 다른 사람들과도 연결되어 있으며, 테오도르와의 관계가 독점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인간이 인공지능과 맺는 관계가 매혹적이면서 동시에, 본질적인 불안정성과 허구성을 띄고 있음을 영화는 이야기해주고 있다.
<그녀>가 던진 메시지는 오늘날 빛을 발하고 있다. 인공지능과 인간과의 관계는 결국 단순 기술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성을 지키기 위한 문제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감정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지만, 동시에 인간성을 약화시킬 위험도 존재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논의와 대처가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