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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에서 만난 합스부르크, 그리고 AI의 주걱턱

근친혼의 비극, 합스부르크 AI

by 최재운

학회 출장으로 오스트리아 빈을 다녀왔다. 다행히(?) 학회 끝나는 날과 직항편의 일자 차이가 있어, 자비로 이틀을 더 체류하며 도시를 둘러볼 수 있었다.


빈에 도착하자마자 깨달은 건, 이 도시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도시라는 것이다. 어디를 가나 시시(엘리자베트 황후)와 모차르트로 가득하다. 관광 상품샵마다 시시의 초상화가 걸려있고, 모차르트 초콜릿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우리에게 합스부르크 하면 마리 앙투아네트가 먼저 떠오르지만, 정작 오스트리아 현지에서는 시시와 마리아 테레지아가 주인공이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16명의 자녀(앙투아네트 포함)를 낳아 유럽 전역에 '수출'한 여제였고, 시시는 그 아름다움과 비극적 삶으로 지금도 오스트리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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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를 상징하는 여인 시시 / 테레지아 / 앙투아네트


세 명의 마르가리타, 근친혼의 비극


빈 미술사 박물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품 중 하나는 벨라스케스가 그린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의 초상화들이다. 마르가리타 공주는 우리에게 <시녀들>이란 그림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국내에서 선풍적인 인기였던 <합스부르크 특별전>의 메인 포스터에 등장한 공주로도 친숙하다.


국내 합스부르크 특별전 당시에는 아래 사진에서 왼쪽 그림이 방한을 했었다. 빈 미술사 박물관에는 이 그림 외에도 다른 나이대에 그린 두 점의 초상화가 더 걸려있다. 3살, 5살, 8살의 마르가리타다.


tempImagec9LZvv.heic 우리 아이는 왼쪽의 마르가리타가 제일 좋다고 한다


자기와 비슷한 또래의 그림이라 그런지 한참을 바라보던 아이. 그리고 질문을 한다. "아빠, 왜 공주 세 명을 계속 그렸어?" 아이의 순수한 질문에 뭐라 답해야 할까. 이 초상화들은 단순한 예술 작품이 아니라, 당시 유럽 왕실의 '상품 카탈로그'였다는 걸 이해하기에는 아직 너무 어린 나이다.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실의 공주인 마르가리타는 3살에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와 약혼했다. 그것도 친삼촌과 말이다. (삼촌과 조카였고 11살의 나이 차이였지만 부부 금실은 몹시 좋았다) 초상화는 빈의 궁정으로 보내져 '신붓감'의 성장 과정을 보고하는 역할을 했다. 15살에 결혼한 마르가리타는 여섯 번의 임신으로 쇠약해진 상태에서 일곱 번째 임신 4개월 도중 사산 후유증으로 2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림 속 마르가리타의 얼굴을 보면, 어린 나이에는 보이지 않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저주가 8살 경에는 나타나고 있다. 돌출된 아래턱, 두꺼운 아랫입술. 후대로 갈수록 더욱 심해지는 '합스부르크 주걱턱'의 초기 증상이 벌써 보인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권력 유지를 위해 철저한 근친혼을 고수했다. 삼촌과 조카, 사촌과 사촌 간의 결혼이 일상이었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합스부르크의 주걱턱이다.


최근 출간 된 내가 쓴 책 『AI, 인문학에 길을 묻다』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유전병이 AI에도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를 담은 개념인 '합스부르크 AI'라는 개념을 소개한 바 있다. AI가 스스로 만든 데이터를 다시 학습하면서 점점 왜곡되어가는 현상을 합스부르크 가문의 근친혼에 빗댄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책에서 확인하면 좋습니다. :)




지금 인터넷은 AI가 생성한 콘텐츠로 넘쳐나고 있다. 블로그 포스트, 뉴스 기사, 심지어 학술 논문까지. AI가 만든 콘텐츠를 다른 AI가 학습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또 다른 콘텐츠를 생성한다. 마치 합스부르크 가문이 같은 유전자를 계속 섞어가며 점점 기형적인 특징을 강화한 것처럼, AI도 그 길을 밟아가지는 않을까?


최근 진행한 작가 인터뷰에서도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은 바 있고, 그에 대한 답을 한 바 있다. (인터뷰 전문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Q) AI가 스스로 만든 데이터를 다시 학습하며 왜곡되는 '합스부르크 AI'라는 개념이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이미 인터넷이 AI가 만든 콘텐츠로 채워지고 있는 지금, 우리는 이 재귀의 저주가 불러올 위험에 얼마나 노출되어 있다고 보시나요? 진짜와 가짜 정보가 뒤섞인 세상에서 인공지능과 공존해야 할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진실을 판단해야 할까요?

A) 지금 인터넷은 AI가 생성한 콘텐츠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죽은 인터넷 이론'이 현실이 되어가는 듯한 모습이죠. 실제로 유튜브, 블로그, X(구 트위터) 등 주요 플랫폼에는 AI가 만든 게시물이 급증하고 있고, AI가 생성한 기묘한 이미지들이 밈으로 소비되기도 합니다. 책에서 언급한 '합스부르크 AI' (AI가 자신이 만든 데이터를 다시 학습하며 점점 왜곡되는 현상)는 이미 현실화되고 있습니다. 최근 연구들은 AI가 AI 콘텐츠로 학습할 때 중요한 정보가 소실되고, 편향이 증폭된다고 경고합니다. (물론 학계에서는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합니다. 적절한 필터링과 큐레이션이 있다면 성능 저하를 막을 수 있다는 주장도 있죠.)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출처 확인과 교차 검증이라는 고전적이지만 여전히 유효한 방법을 철저히 실천해야 합니다. 특히 감정을 자극하거나 너무 완벽해 보이는 콘텐츠일수록 의심해 봐야 합니다. 하지만 가장 강력한 대응책은 우리 스스로가 '진짜 콘텐츠'의 생산자가 되는 것입니다. 직접 경험하고, 생각하고, 기록하는 과정을 통해 진위를 판별하는 감각을 기를 수 있습니다. AI 시대의 역설은, 오히려 인간의 직접적인 경험과 성찰이 그 어느 때보다 귀해진다는 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인터뷰 전문 링크



합스부르크 가문은 결국 근친혼의 저주로 몰락했다. 우리의 AI는 어떨까? 데이터의 근친혼을 피하고, 다양성을 유지하며, 인간의 진짜 경험과 지혜를 계속 주입한다면, 아마도 다른 결말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우리가 역사, 그리고 인문학에 AI의 길을 물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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