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촉오도 아닌 진나라가 통일한다고??
아직 32개월인 우리 아들은 이솝 우화 이야기를 좋아한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동물들의 행동이 아직 웃긴가 보다. 스토리를 온전히 이해 못 하지만, 동물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며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을 즐기는 녀석. 이솝 우화에 등장하는 동물 중 가장 좋아하는 동물은 바로 까마귀.
아마 그간 본 그림책에서 쉽게 볼 수 없었던 동물이라 그런지, 발음이 재밌어서 그런지 까마귀가 나오는 이솝 우화를 종종 읽어달라고 한다. 한날은 까마귀가 나오는 다양한 이솝 우화 중 <까마귀와 여우>를 선택해서 읽어주었다. 대략의 줄거리는 까마귀가 고기를 입에 물고 있었는데, 여우의 꾀에 속아 고기를 못 먹게 되는 이야기. 까마귀에 감정 이입을 하고 있던 아들은 고기를 못 먹는 엔딩에 꽤나 충격을 받았나 보다. 자꾸 '까마귀 고기 못 먹었어'를 이야기하고 다니며 슬퍼하는 모습을 보니, 이게 우리 아들이 접한 첫 새드 엔딩 이야기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우 입장에서는 해피 엔딩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해피 엔딩을 좋아한다. 기본적인 인간의 성향상 본능적으로 긍정적인 결과를 선호하기에, 해피 엔딩은 안정감과 행복감을 준다. 생물학적으로도 우리의 뇌는 긍정적인 결과를 보았을 때 도파민을 분비한다. 또한, 해피 엔딩은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우리가 어렵고 늘 도전에 직면할 때, 긍정적인 결과의 작품들을 보며 힘을 얻는다.
하지만 새드 엔딩 또한 사람들에게 강한 감정적 반응을 불러오며 사랑받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Poetica)에서 그는 비극을 통해 관객이 자신의 감정을 정화하고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고 말한 바 있다. 슬픈 결말은 우리의 감정의 경험 깊이를 느끼게 해 주고, 더 나아가 현실의 복잡한 감정을 해소하여 일상의 문제로부터 일시적인 해방감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즉, 새드 엔딩은 인생의 쓴 맛을 좀 봐야 와닿게 된다. 그렇기에 32개월 아들 녀석에게는 까마귀의 새드 엔딩이 충격적이었을 수 있다.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놀고 싶은 거 다 놀고, 궁금한 건 부모가 다 대답을 해주는 본인의 세계에서 새드 엔딩이라니! 까마귀가 고기를 못 먹었다는 엔딩에 이상 반응을 보이는 모습을 보며 나의 첫 새드 엔딩 스토리 경험은 언제인가 생각해 보았다.
바로 초등학생 때 처음 삼국지를 읽고 받은 강렬한 충격이 첫 새드 엔딩 스토리 경험이다.
<삼국지>에 대한 언급은 별도로 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중국 후한 말 황건적이 봉기하는 180년경부터 진나라의 사마염이 천하를 통일하는 280년까지의 실제 중국 역사를 14세기 나관중이 MSG를 첨가해 소설로 만든 것이 바로 <삼국지연의>이며, 보통 우리는 이를 삼국지라고 통칭한다. 삼국지는 중국 문학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로, 중화권은 물론 한국이나 일본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90년대는 삼국지 전성시대로, 서울대 합격생이 삼국지를 수 차례 읽었다는 등의 인터뷰로 가정마다 삼국지가 전집으로 보급이 되었고, 인기를 반영하듯 다양한 판본의 삼국지가 인기를 끌었다.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삼국지는 당연히 이문열의 삼국지. 2천만 부 이상 팔린 실적만 보더라도 그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문열 삼국지는 작가의 해석이 과도하게 들어간 점, 다양한 고증 오류 등으로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이문열 삼국지 이외에도 황석영, 김홍신의 삼국지도 꽤 인기가 있었다.
훗날 도서관을 통해 이문열, 황석영의 삼국지는 수 차례 독파한 바 있지만, 나에게 최고의 삼국지는 바로 월탄 박종화의 삼국지이다. 초등학생 때로 기억한다. 어머니께서 부산 보수동 헌책방에서 사 오신 나의 최고 보물 월탄 삼국지가 바로 그것인데, 헌책방에서 구매한 것이라 조금 낡긴 했지만 월탄 선생의 구수한 말투와 충실한 내용이 어린 나를 정말 매료시켰다. 1권부터 8권까지 통독을 한 횟수도 셀 수가 없고, 촉의 최전성기인 형주 탈환, 입촉, 한중 공방전 부분을 다루고 있는 5권은 책이 닳도록 읽었던 기억이 난다. 제갈량의 칠종칠금 남만 정벌과 육출기산 역시 몇 번을 읽었는지 셀 수가 없을 정도.
안타깝게도 이사 등을 거치며 초등학교 시절 읽었던 월탄 삼국지는 분실이 되었고, 월탄 삼국지가 2009년 새로운 판본으로 발매가 되어 살펴본 적이 있다. 하지만 어렸을 때 읽었던 판본 대비 읽는 맛이 심하게 사라져 있었다. 요즘 스타일을 따라가려다 보니 이도 저도 아닌 판본이 된 것이다. 그래서 중고 장터를 뒤져 정가보다 훨씬 비싸게 20만 원가량을 지불하고 어린 시절 본 월탄 삼국지 전집을 입수하였다. 나의 가장 귀한 보물 중 하나인 월탄 삼국지는 지금도 나의 연구실 책장 한편을 차지하고 있다. 언제든 아무 책이나 잡고 아무 페이지를 읽어도 어색함이 없게 나를 기다리고 있다.
월탄 박종화 선생의 삼국지는 나만 애정하는 것이 아니다. 1968년 초판이 발매되었고, 이문열 삼국지 이전까지 한국에서 가장 유명했던 평역본이 바로 월탄 삼국지이다. 월탄 삼국지의 가장 큰 장점은 담백함이다. 이문열 삼국지처럼 해석이 과하거나, 표현이 현학적이지 않고 삼국지연의 원본을 그대로 전달해 준다. 지금 보면 예스러운 표현이 종종 보이지만 이 역시 월탄 선생의 어투와 어우러지며 크게 어색함을 못 느끼게 한다. 구성도 말 그대로 무난하다. 대부분 삼국지들이 스킵을 많이 하는 제갈량 사후 장면을 꽤나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사마탄, 문앙, 양호, 육항 등 제갈량 사후의 인물들에 대해서도 비중을 줄이지 않고 무던하게 이야기해 준다. 그래서일까, 삼국지 마니아들이 모여있는 삼국지 갤러리에서도 최고의 삼국지로 꼽는 것이 바로 월탄 삼국지이다.
월탄 삼국지의 특징 중 하나는 작중의 큰 사건이 끝나면 훗날 시인들이 이를 시문으로 정리/평가하는 부분까지 번역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요 사건은 삽화도 함께 삽입이 되어 있어 보는 맛을 더해준다. 현재 출판사 달궁에서 판매 중인 작품은 현재 내가 보유하고 있는 작품 대비 예스러움이 떨어지는데, 수많은 삽화들이 빠져 있는 것이 가장 아쉬운 점이다. 게다가 주요 인물이나 사건이 있으면 한자도 같이 명기되어 있다. 그래서 한자를 크게 공부하지 않았음에도 한자를 음독하는 능력이 자연스레 습득되었다. 가령 예를 들어 曹 글자는 조조의 앞의 조이고, 趙는 조자룡의 조이구나 하는 식으로 쓸 수는 없어도 보면 읽는 능력이 나도 모르게 생기고 만 것이다.
다시 새드 엔딩 스토리로 돌아가보자.
삼국지를 난생처음 소설로 읽었던 당시 기억이 난다. 삼국지연의의 주인공은 후한의 후계자이자 촉한을 건립한 그 유명한 유비 현덕이다. 유비가 의형제인 관우, 장비와 함께 한나라 부흥을 위해 좌충우돌하는 게 주요 이야기 흐름인데, 유비를 계속 방해하는 것이 바로 위나라를 세운 조조이다. 지금에야 조조 재평가론도 많고, 진정한 리더는 조조라는 책도 많이 나왔지만 어린 시절 유비는 나에게 정의의 사도였고 조조는 악마로 비쳤다.
그래서 당연히 유비가 온갖 시련을 겪어도 끝내 조조를 이길 것이라 생각했다. 어린 시절까지 읽은 수많은 동화책, 그리고 TV로 본 만화에서 늘 착한 편은 시련을 이겨내고 최종 승리를 거두었다. 당연히 삼국지에서도 그러한 결과가 나올 것이라 생각하며 읽어갔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
한중을 정벌하고 한중왕에 오르며 이제 유비, 촉나라가 잘 나갈 일만 있겠구나 하며 읽어가는데, 어어 하다가 의형제인 관우 운장이 오나라의 계략에 빠져 너무나 허무하게 참수당한다. 이게 뭐지 하며 읽어가는데 또 다른 의형제인 장비 익덕도 부하에게 암살당하고, 유비는 동생의 원수를 갚기 위해 말리는 제갈량을 뿌리치고 오나라로 쳐들어갔다가 이릉 대전에서 대패하고는 병사해 버린다.
많은 이들이 삼국지에서 가장 애정하는 인물인 관운장이 사망한 것부터 이상함을 느꼈는데, 장비, 유비까지 한 방에 소설에서 퇴장해 버린다. 처음 이 대목을 접했을 때 어린 나는 정말 큰 충격을 받았다. 아니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린다고? 부활하고 이런 건 없나? <독수리 오 형제>에서도 둘째인 혁이 사망했다가 다시 돌아오는데 유비, 관우, 장비는 이렇게 가버린다고?
그래도 아직 우리에게는 제갈량, 공명 선생이 남아 있었다. 삼국지의 본고장 중국에서는 관운장을 제일 좋아하고, 일본은 조자룡을, 한국은 제갈공명을 제일 좋아한다는 신뢰도 낮은 이야기가 떠돌 정도로 제갈공명은 촉한의 마지막 희망이자 먼치킨 캐릭터이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제갈량은 역사에 길이남을 명문 출사표를 던지고 기산으로 나아가지만, 등산왕 마속에 의해 좌절이 되고, 이후 다섯 번 더 출정. 육출기산을 하며 죽은 유비의 유지를 받들려고 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오장원에서 그만 제갈량까지 병사하고 만 것이다.
이 대목에서는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지는 좌절감을 느꼈다. 아니 '이렇게 제갈량도 끝난다고? 제갈량도 가면 이대로 촉나라는 어떻게 되는 거야?' 하는 생각에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결국 아이러니하게도 삼국지의 세 개 국가, 위나라, 촉나라, 오나라는 그 누구도 삼국을 통일하지 못하고, 위나라에서 파생된 사마염의 진나라가 삼국을 통일하지만, 이후 중국은 남북조 시대, 5호 16국 시대의 전란으로 다시 빠져들게 된다.
아들이 이솝 우화 보면서 좌절하던 모습이 삼국지를 보며 좌절하던 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여 글을 한 번 써봅니다. 단편으로 쓰려했으나 역시나 할 이야기가 많네요.
다음 편에서는 삼국지를 해피 엔딩으로 만들기 위한 저만의 이야기가 진행이 됩니다. 게임으로 대체역사소설로 삼국지의 새드 엔딩을 극복하는 모습도 많은 기대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