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부터 소설까지
인류는 영웅의 이야기를 흠모한다.
신에 도전한 영웅인 길가메시의 이야기를 점토판에 필사하던 수메르의 어린아이처럼, 트로이 전쟁의 아킬레우스와 헥토르 이야기를 서사시로 즐기던 아테네의 어린아이처럼, 히타이트와 전투를 승리로 이끈 영웅 람세스 2세의 벽화를 경외감으로 바라보던 이집트의 어린아이처럼, 황금 권자에 앉은 샤를 대제의 이야기를 듣는 중세의 어린아이처럼 우리는 영웅의 대서사시를 흠모한다.
서구권에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있다면, 동양에는 삼국지가 있다. 위촉오 세 개의 국가가 백 년에 걸쳐 천하를 차지하기 위해 벌이는 혈전에는 수많은 영웅들이 등장하고, 동양의 많은 어린이들은 밤을 새워가며 흥미진진하게 영웅들의 이야기를 숨죽여 지켜본다. 하지만 다수의 아이들이 감정을 이입하며 응원한 유비 현덕의 촉나라, 촉한은 결국 멸망을 하고, 위촉오 어느 국가도 천하를 제패하지 못한 채 사마염의 진나라가 통일을 해버리며 삼국지는 대망의 막을 내린다. 삼국지를 처음 접한 한 어린이의 어처구니없으면서 슬픈 감정을 이전글(인생 첫 새드 엔딩 스토리는?)에서 다룬 바 있다.
이후 그 어린이는 현실의 냉혹함을 알아가게 된다. 삼국지를 통해 역사에 흥미를 가진 후, 다양한 역사 사례들을 보며 항상 해피엔딩만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알렉산더가 동방을 재패했음에도 요절한 사실을,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었지만 끝내 패배한 사실을, 나폴레옹이 여러 차례 재기를 노리지만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며 몰락한 사실들을 보며 영웅들도 실패한다는 어찌 보면 당연한 세상의 이치를 깨우쳐간다.
그럼에도 처음으로 인생의 냉정함을 알려준 삼국지만큼은 해피 엔딩을 바라고 또 바라는 거 보면 이것이 첫사랑의 놀라움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비록 현실에서의 삼국지는 누군가에게 해피 엔딩을, 누군가에게 새드 엔딩이었겠지만, 가상 세계에서만큼은 나에게 온전한 해피 엔딩을 만들어갈 수 있는 경험들이 여러 차례 있었다.
초등학교 2~3학년쯤으로 기억한다. 아직 집에 컴퓨터가 없어 친구 집에서 컴퓨터 게임을 종종 하곤 했는데, 그 친구가 알려준 게임이 바로 코에이(Koei)에서 출시한 <삼국지 2>였다. 삼국지 게임은 삼국지 소설을 배경으로 등장인물이나 등장세력 중 하나가 되어 혼란에 빠진 중국을 통일하는 것이 목표이다. 그 과정에서 전쟁은 물론이고 정치, 경제 등을 관리하며 나라를 내실 있게 통치하여 힘을 키운 후 상대 세력을 물리치는 것이 게임의 핵심이다.
아직 한글판이 출시 전이었는지 영문판을 함께 놀았는데, 영어에 대해 전혀 몰라도 삼국지라는 공통분모 하나만으로 꽤나 즐겁게 플레이했던 기억이 난다. 조조가 'Cao Cao', 관우가 'Guan Yu'로 나왔던 게 아직 뇌리에 남아있는 거 봐서는 영어도 모르는 두 초딩이 얼마나 열심히 삼국지 2를 플레이한 건지 알 수 있다. 아직도 10번 땅인 낙양을 점령했다가 빠져나오는 식으로 해서 아이템을 계속 획득했던 팁 아닌 팁도 기억에 난다.
본격적인 삼국지 게임은 <삼국지 3>가 그 시작이었다. 지금도 화면만 보면 가슴이 뛸 정도로 즐겁게 했던 게임이 삼국지 3이다. 삼국지 2까지는 게임이 조금 단순했다고 한다면, 3부터는 진정한 전략시뮬레이션이라고 할 정도로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여전히 게임을 온전히 즐기기에는 어린 나이였던지라 정석으로 플레이해서는 천하통일이 어려웠고, 에디터의 힘을 많이 빌린 기억이 난다. 에디터의 힘으로 온갖 유명 장수를 등용하고 백만 대군을 일으켜 유비가 조조를 물리치는 모습은 소설 삼국지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카타르시스를 안겨주었다.
이후 삼국지 4, 5, 6, 7, 11을 섭렵하며 게임 실력 역시 일취월장하기 시작한다. 이제 에디터의 도움 없이 유비의 천하통일을 이뤄야 할 때가 왔다. 가장 애용한 시나리오는 194년 유비. 전국 각지에 군웅들이 자리를 잡고 유비는 서주라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버전마다 달랐지만 서주성만 가지고 있거나, 서주, 소패를 가지고 있는 우리의 유비. 게임 속 유비는 실제 역사만큼이나 버티기 힘들다. 실제 역사에서 여포에게 털려 서주를 잃고 마는 것처럼 여포가 끊임없이 쳐들어오고, 조조와 원술 역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 하지만 게임은 게임! 여기서 잘 버티면서 여포만 무찌르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실제 역사가 아닌 가상 역사를 만들어갈 수 있다. 바로 여포의 세력을 흡수한 유비의 폭풍 성장으로 단숨에 천하통일까지 한 방에 나아간다.
이외에도 다양한 시나리오를 접하며 나만의 삼국지를 써내려 갔다. 208년 유비를 선택해 삼고초려로 제갈량을 등용한 후, 조조의 물량에 힘겹게 버티며 세력을 키워나가기도 하였다. 삼국지 5 이후부터는 다양한 군주를 선택하며 게임의 재미를 느껴보기도 하고, 삼국지 7에서 처음 도입된 장수제의 재미도 느껴보고, 대학시절 삼국지 11을 밤새도록 해보기도 하였지만, 초등학생 시절 찔끔찔끔 한정된 시간을 이용하여 유비로 천하통일을 하던 재미를 따라갈만한 경험은 이후 없었다. 아마 새드 엔딩을 처음으로 극복하고 유비가 삼국을 통일하는 첫 삼국지 게임의 추억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 아닐까?
삼국지 게임하면 코에이의 전략시뮬레이션 삼국지가 떠오르지만, 그것만큼 재밌게 한 게임이 있다. 바로 같은 회사인 코에이에서 출시한 <삼국지 영걸전>이다. 그냥 삼국지 게임이 전략시뮬레이션 장르로 세력을 선택해 자유롭게 플레이하며 천하를 통일하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면, 영걸전은 유비가 그냥 주인공이다. 유비를 주인공으로 해서 정해진 스토리에 맞춰 동료들과 함께 천하통일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바로 영걸전이며, 전통적인 롤플레잉게임(RPG) 방식을 따른다.
영걸전은 자유도가 없다. 대신 실제 역사를 따라가며 열심히 유비 측 세력의 레벨을 업 시킨다. 그러다 나타나는 분기점이 바로 관우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맥의 전투'. 맥의 전투에서 관우를 살리게 되면 이제 역사는 바뀌게 된다. 장비도 죽지 않게 되고 유비, 관우, 장비와 제갈량은 벅찬 북벌을 하게 된다. 유비와 장비, 제갈량은 원역사에서 제갈량이 밟은 북벌 루트를, 방통과 조운은 형주를 통한 별동대 진격을 통해 위나라를 물리치며 유관장 삼 형제가 통일하는 스토리. 마지막에 죽은 걸로 알려진 조조가 등장하는 사소한 해프닝이 있지만, 유비가 천하통일 해나가는 스토리를 함께 진행해가다 보면 삼국지가 해피 엔딩이었으면 이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어린 맘에 해봤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이 등의 요소로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었지만 게임적 허용이 있으니)
영걸전이란 게임 역시 초등학생이 하기에는 꽤나 어려운 게임이었다. 지금이야 다양한 공략이 있어 영걸전을 쉽게 깰 수 있지만, 온라인이 활성화 안 되어있던 시절 영걸전은 초딩들에게 헬 모드와 다름없었다. 지금처럼 세이브/로드가 가능한 게임이 아니어서 전투를 무를 수가 없었고, 유비의 실제 역사를 따라가다 보니 '거록 전투', '장판파 전투', '이릉 전투'는 그냥 플레이했다가는 수 차례 게임오버 당하게 된다. 심지어 마지막 '업의 전투'는 세 판이 연속해서 이어지며, 중간에 세이브도 안 된다. 대략 기억으로 한 판당 최소 30분씩 1시간 반 이어지는 플레이타임은 당시 초등학생들이 엄마에게 등짝을 맞는 주된 이유 중 하나였다. 심지어 마지막 전투 난이도도 헬이어서, 조조가 살아 나오고, 업성에 불을 질러 시작하자마자 모든 아군의 체력이 절반으로 주는 온갖 고난이 벌어지게 된다. 그래서 등장한 게 유비 코를 계속 누르면 유비가 레벨 99가 된다는 치트키! 하지만 여기에 안주했다가는 동료들의 레벨이 안 올라 뒤로 가면 헬모드가 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초딩들에게 온갖 좌절을 줬지만 유비가 통일한다는 카타르시스도 함께 제공한 영걸전. 이후 <삼국지 공명전>과 <삼국지 조조전>, 조조전의 모바일 버전까지 다양하게 플레이해 봤지만 영걸전만 한 재미를 준 작품은 없었다. 공명전은 영걸전 난이도가 너무 어려운 걸 의식한 나머지 너무 난이도를 낮춰 조운과 장억만 있으면 끝 판을 쉽게 깰 수 있었고, 조조전도 정말 재밌게 하긴 했지만 영걸전이 주는 만족감까지 함께 주진 못했다. 몇 년간 꾸역꾸역 한 조조전 모바일은 할많하않...
게임으로 삼국지의 새드 엔딩 충격을 잊어가고 있던 초등학생 시절. 함께 삼국지를 했던 바로 그 친구가 어느 날 흥분한 목소리로 다가와서는 이야기를 한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사실, 삼국지 이후 새로운 역사가 있었다! 유비의 후손인 유연과 관우의 후손 관근, 장비의 후손 장빈이 진나라를 무찌르는 역사가 삼국지 뒤에 펼쳐졌다.
그러면서 마치 무공비급을 전달하듯 책을 빌려준다. 정말 오래된 무공비급과 같이 낡은 책의 이름은 바로 <후삼국지>
삼국지 이후에 몰랐던 역사가 있었다니! 그것도 유비의 후손들이 함께 연합해서 진나라를 이겨나갔다는 내용은 결국 정의는 승리하는구나 하는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친구가 건네어준 무공비급은 너무 낡아서인지 아니면 원전이 부실했는지 뒤로 갈수록 내용의 짜임새가 이상해지고 스토리는 산으로 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실제 역사가 아닌 지금으로 치면 대체역사소설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허무해졌던 기억이 난다.
유비의 후손인 유연이라는 문구를 보자마자 중국사에 통달한 사람이라면 유연이 유비의 후손이 아니라 흉노족 출신의 조나라를 세우며 5호 16국이라는 헬게이트를 오픈한 유연이라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또한 소설 후삼국지의 후반부 주인공이자 소설에서 조운의 후손으로 나오는 석륵 역시 후조를 세운 흉노족 영웅 석륵임을 이후에 5호 16국 시대 책을 보며 알 수 있었다.
아마 삼국지의 새드 엔딩이 분했던 사람이 5호 16국 시대 영웅들의 성씨를 삼국지와 연결하여 대체역사소설을 쓴 것이 지금까지 남아 전달이 되며 전설의 판타지 <후삼국지>가 아닐까?
이제 삼국지의 새드 앤딩을 게임으로 바꾸기에는 나이상 무리이다 생각이 되는 분들은 삼국지를 다루고 있는 대체역사소설을 살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물론 후삼국지와 같은 허무맹랑한 작품이 아닌 명작의 반열에 오른 대체역사소설들이 바로 그것이다.
대체역사소설은 웹소설의 한 장르로 대중적인 장르는 아니지만 소위 말하는 역덕들에게 카타르시스와 사이다를 안겨주기에 나름의 파이가 큰 장르이다. 주로 조선 시대나 세계사 격변기에 회. 빙. 환(회귀, 빙의, 환생)을 통해 미래 지식을 알게 된 주인공이 역사를 바꾸는 게 주요 서사로,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나 <블랙 기업 조선> 같은 작품은 메가 히트를 치며 작가들을 돈방석에 앉게 하기도 하였다.
삼국지 역시 대체역사소설(이하 대역)의 주요 소재 중 하나로, 워낙 삼국지 마니아들이 많아 나름 잘 팔리는 웹소설 장르가 되었다. 대부분의 삼국지를 다루고 있는 소설들은 기존 대역의 클리셰를 따라 미래 지식을 알고 있는 주인공이 삼국 시대에 강제로 워프 하게 되어 벌어지는 일을 주로 묘사하고 있다. 미래를 알고 있는 주인공은 아직 발굴되지 않은 인재들을 먼저 영입하고, 실제 역사의 일들을 미리 예견하고 이를 적절히 이용하면서 세력을 불려 나가 통일에 이르게 되는 스토리가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요즘 나오는 삼국지 소설 중 흥미를 끄는 것은 많지 않은 편이다. 그럼에도 삼국지로 대역에 입문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추천해 주는 작품 두 개가 있다.
하나는 바로 조경래 작가의 <삼국지 마행처우역거>이다.
대역 작가 네임드 중 한 명인 조경래 작가의 역작으로, 촉나라의 멸망이 안타까웠다는 분들에게는 정말로 카타르시스를 안겨줄 수 있는 작품이다. 마행처우역거는 말이 가면 소가 따라간다는 말로 주인공인 비관(소)이 제갈량(말)과 함께 위를 물리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촉한을 좋아한다면, 제갈량을 좋아한다면, 책사들의 치열한 두뇌싸움을 좋아한다면 정말로 강추하는 작품이다.
주인공은 촉의 원주인이었던 유장의 사위인 비관으로, 현대인이 비관에 빙의가 되며 벌어지는 내용이다. 비관이 유비의 편에서 가족의 복수를 위해 촉한을 부흥시키는 내용은 실제 역사에서 실패하는 촉한의 역사를 사이다처럼 뒤엎었다는 점에서 큰 재미를 준다. 중간중간 나오는 작가의 진지한 유머와 다소 가려져 있던 삼국시대 말기 영웅들에 대한 조명은 책을 읽어가는 또 하나의 재미를 안겨다 준다. 그래서 삼국지 대역 작품 중 마행처우역거를 최고로 꼽는 사람들이 많다.
또 다른 추천작은 간절히 작가의 <아! 내가 마속이다>
삼국지는 워낙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작품이라 다양한 논의가 아직도 웹 상에서 진행이 되고 있다. 그중 하나가 제갈량의 1차 북벌 때 마속이 가정전투에서 등산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가정이다. 제갈량이 가장 믿고 아꼈던 마속이 1차 북벌 때 산에서 진을 치지 않고 산에서 내려와 가정을 지켜냈다면 이후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를 논하는 것은 삼국지 커뮤니티의 단골 소재를 넘어 사골이 된 주제.
이를 대역으로 풀어낸 작품이 바로 <아! 내가 마속이다>이다. 역시나 현대인이 마속에 빙의가 되어 벌어지는 이야기로, 주인공이 된 마속은 현대의 기억을 떠올려 가정에 있는 산에서 내려와 산 밑에서 진을 펼치게 된다. 이후 역사는 급변하게 되며 제갈량의 촉한은 다시금 부활할 수 있는 원동력을 얻게 된다.
이 작품은 기존 대역의 무거움을 상당 부분 덜어내고 가볍게 웹소설화 했다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대역이 어렵거나 너무 진중해서 접근하기 힘들었던 독자층을 포섭하는 데 성공했단 평가를 받는다. 또한 제갈량에 대한 묘사를 가장 잘 한 작품 중 하나라는 평가도 받는다. 말 그대로 제갈량 뽕으로 가득 찬 소설이라 촉한빠들에게, 제갈량빠들에게 열혈 사랑을 받은 작품이다.
촉한의 부활을 소설로나마 읽어보고 싶은 분들은 이 두 소설을 한 번 읽어보길 추천한다. 마행처우역거는 삼국지는 좋아하지만 웹소설은 처음인 사람이 보기 좋지만 분량이 방대하다는 단점이, 아!내가마속이다는 분량은 적절하지만 깊이가 조금 얕다는 단점이 있으니 취사선택하시길 :)